300만 원짜리 ‘디올백’ 유감[김지현의 정치언락]

김지현 기자 2024. 1. 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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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에서 판매 중인 315만 원짜리 ‘레이디 디올’ 파우치. 디올 홈페이지 캡처
이렇게까지 온 국민이 명품 ‘디올’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나 싶습니다.

2022년 9월 김건희 여사가 자신의 서초동 사무실에서 재미교포 목사로부터 디올백 선물을 받는 듯한 몰카 장면이 지난해 11월 한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이후, 해가 넘어가도록 디올백이 정치권을 계속 뒤흔들고 있습니다.

1월 22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이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수수 의혹 관련 ‘몰카’ 동영상을 틀어놓은 채 의사진행 발언을 했다. 오른쪽은 집단 불참해 비어있는 국민의힘 의원석. 동아일보 DB
당연히 받지 말았어야 했던 물건이고, 해선 안 됐던 함정 취재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받았고, 몰카는 만천하에 공개된 것을. 이제 남은 건 어떻게 수습하느냐의 문제인데, 그 과정에서 현 집권당의 처참한 수준이 고스란히 노출된 것 같습니다.
김건희 여사 ‘함정 클러치 백’ 사과해야 수도권 승리한다는 망상!

○ FL이 받은 백은 명품백 범주에 들지 않는 싸구려 파우치, 용어 재정립 필요
- 사회과학적 접근을 위해서는 용어 정의가 중요
- 1천만원 상당 샤넬, 에르메스 버킨백 등을 통상 명품백이라 칭하며, FL이 받은 건 3백만원 상당 파우치에 불과
- 좌파들의 용어 선점에 맥없이 당한 것
(중략)

○ FL이 사과하면, 수도권에서 지지율이 올라가나?
- 사과를 하든 안하든 지지율은 올라가지 않으며, 사과를 하는 순간 민주당은 들개들처럼 물어뜯을 것임
- 특히 사과의 진정성이 없다며 매도하고 남편이 책임지라는 수순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
- 김경율은 이론적 투사에 불과, 실전적 투사 아니기에 그저 앉아서 한 생각에 지나지 않음

○ 사과하면 선거 망치는 길이며, 이런 마타도어에 속으면 안됨
- FL이 싸구려 파우치 받은 걸 다 알고, 국민의힘 예비후보로 나서놓고 이제와서 FL 때문에 선거 망칠 것 같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음
- 박근혜 대통령도 사과해서 범죄가 기정사실화되고 탄핵까지 당한 것
- 사과와 용서, 관용은 정상적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는 것이며, 좌파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
- 침묵도 사과의 한 방법
위 내용은 한 전직 기자 출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의 요약본입니다. ‘받은 글’, 이른바 찌라시 형태로도 돌았었는데요, 이같은 내용을 친윤(친윤석열)계 초선 이용 의원이 1월 20일 국민의힘 의원 단체 채팅방에 공유했다죠. 글의 요점은 ‘FL’(First Lady·영부인), 김 여사 논란에 대해 사과하면 총선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 침묵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울러 FL이 받은 건 명품 가방이 아닌 ‘300만 원짜리 파우치’에 불과하다며 ‘사회과학적’으로 용어를 재정립해야 한다고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통상 ‘명품백’으로 불리는 샤넬, 에르메스도 아닌 디올, 그것도 가방도 아니고 고작 300만 원밖에 안 하는 ‘싸구려 파우치’를 받은 것일 뿐인데 좌파들의 ‘프레임’ 공격에 당한 것이란 겁니다. 그럼 뭐 ‘서민용 손가방’ 정도로 불러야 한다는 걸까요.

보수 성향의 지지자나 유튜버라면 얼마든지 이런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칭타칭 ‘친윤’이라는 현역 의원이 이를 정리해 자기 페이스북도 아니고 전체 여당 의원 채팅방에 공유하는 건 또 다른 얘기입니다. 곧장 기사로 보도돼 공론화됐으니 말입니다. 자기들끼리 보고 끝날 줄 알았다면 정말 나이브한 것이고,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라면 처참한 전략 같습니다. 이용 의원은 당시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해당 글을 올린 배경에 대해 “종북 좌파 목사가 (김 여사) 아버님과 친구라고 접근해서 함정 취재를 한 것 아니냐”라며 “그런 원초적인 것은 빼고 영부인이 사과하게 되면 민주당에서 가만히 있겠느냐(는 취지)”라고 설명했습니다.

국민의힘 이용 의원. 이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수행 실장을 맡았던 ‘친윤’계다. 동아일보 DB

이틀 뒤엔 또 한 번의 황당한 발언이 이번에도 ‘친윤 핵심’ 입에서 나옵니다.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 겸 공천관리위원을 맡은 이철규 의원은 1월 22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김 여사 건은) 몰카 공작이잖아요. 교통사고 나면 교통사고를 야기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합니까? 왜 집에 안 있고 길거리에 나와서 교통사고 당했느냐고 여러분께 책임을 묻는다면 동의하시겠어요? 똑같은 케이스잖아요.”

“(디올백은) 이미 국고에 귀속이 됐는데 국고에 귀속된 물건을 반환하는 것은 국고 횡령이에요. 그 누구도 반환 못합니다. 그건 대한민국 정부 거죠. 그런데 그걸 반환해라 또 사과해라…. 사과라는 것은 불법이라든가 과오가 있을 때 사과하는 거예요.”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 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은 이 의원은 이번 일을 “교통사고”에 빗대며 “국고에 귀속된 물건을 반환하면 국고 횡령”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DB
이게 왜 교통사고 같은 사안이라는 걸까요. 자기 의지로 피하기 어려운 교통사고와 달리 김 여사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발언이 나오니 민주당만 신나겠죠. 민주당 박성준 대변인은 기다렸다는 듯 “고가 명품 가방을 수수한 김 여사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려는 이철규 의원의 주장이 참으로 해괴망측하다”며 “한동훈 위원장도 김 여사가 피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는지 입장을 밝히라”고 압박했습니다. 입으로 매를 번 셈입니다.

이미 국고에 귀속된 물건이기 때문에 ‘반환하면 국고 횡령’이라는 주장도 황당합니다. 디올백이 ‘대통령기록물’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 같은데요, 현행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에 따르면 ‘대통령 직무수행과 관련해 국민‧국내 단체로부터 받은 선물로 국가적 보존 가치가 있는 선물’, 또는 ‘직무와 관련해 외국인‧외국 단체로부터 받은 선물’이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합니다.

김 여사에게 선물을 건넨 재미교포 목사가 설령 미국 시민권자라 하더라도, 해당 선물은 직무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대통령기록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같은 당 김웅 의원이 “우리 당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게 대통령기록물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그 디올백이 만약에 기록물에 해당된다고 하면 갤러리아 명품관은 박물관이냐”고 했겠습니까.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그는 이번 논란에 대해 “사소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동아일보 DB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까지 등판해 이번 스캔들을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사소한 일로 부각을 많이 시키는 가방 스캔들. 이거는 너무너무 작은 일이고 또 전 대통령, 심지어 존경하는 우리 김대중 대통령 사모님도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있었고, 누구인지 잘 알겠지만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데 친하지 않은 사람은 거절하기가 쉽죠. 그런데 아버지하고 지인이 왔다? 굉장히 아는 얼굴이다? 그러면 예의 있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걸 가지고….” (1월 25일 채널A 유튜브 중)

당을 혁신해야 한다고 큰소리쳤던 분조차 어느덧 당내 주류와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질은 몰카’이며, ‘사소한 일’에 불과하며, ‘민주당은 했으면 더 했다’는 겁니다.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에게 기대하는 건 저런 식의 하향평준화가 아닌데 말이죠.

외신들도 이런 광경이 신기한가 봅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A $2200 Dior handbag shakes South Korea’s ruling Party(2200달러짜리 디올 핸드백이 한국 집권당을 뒤흔들다)”고 썼고, 영국 가디언도 ‘The first lady and the Dior bag: the scandal shaking up South Korean politics(영부인과 디올백: 스캔들이 한국 정치를 흔들고 있다)라는 기사에서 “한국 드라마(K-drama) 속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 한국 정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서도 다룬 디올백 논란. 홈페이지 캡처
민주당만 또 신났습니다.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해외 유명 외신들이 일제히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을 다뤘다”며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으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끝없이 추락 중”이라고 했습니다.

선물을 받은 것은 김 여사이고, 국민들이 돌려달라 한 것도 아닌데,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사과하라는 거냐”고 따지는 집권여당 수준이 참 한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치언락’ 칼럼을 쓰면, 칼같이 세금까지 떼서 건당 약 5만 원 정도 들어오는 것 같던데, 이번이 56번째 언락이니 4번 정도 더 쓰면 마침내 ‘싸구려 파우치’ 하나 ‘내돈내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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