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정상은 어렵겠다. 내려가라" 눈물 울컥하던 순간

여정윤 동아대산악회 2024. 1. 3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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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서 산악인으로! 남미 최고봉 도전기 8회 마지막회
아콩카과(6,962m) 정상에 오른 동아대산악회 재학생 대원들. 아쉽게도 나는 고소증세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말로 듣던 대로 무지막지한 바람이 분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텐트 안에서 잠을 청하는 건 쉽지 않다. 해발 6,000m 높이인 캠프3에 있으면 생명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차고, 속이 메스껍다.

그렇게 뒤척이고 있는데, 가이드가 깨우러 왔다. 벌써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부스럭 부스럭 정상 갈 채비를 마치고, 기다린 시간이 시작되었다. 정상 공격이다. 한 줄로 서서 가이드의 속도에 따라 한발씩 걸었다. 역시 숨이 차다. 너무나도 숨이 차서 조금이라도 호흡이 흐트러지면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뒤처지고 싶지 않아 땅과 내 발끝만 보며 걸었다.

주위 풍경도 중요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내 발끝을 보며 콧구멍과 입을 벌려 최대한 공기를 빨아들이려 호흡에만 집중하며 걸었다. 그렇게 1시간을 고개를 땅에 박고 걸었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남미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못 견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좋지 않다. 힘이 없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겠지? 다 참고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바닥에 앉았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니 다시 일어나기 힘들었다.

제일 느린 나를 대열 선두로 세워 운행하다가 나중에는 너무 느린 나머지, 나를 대열에서 제외시켰다. 지나쳐가는 대원들이었지만 다들 나를 걱정했다. 어제 자기 전까지 열심히 나에게 따뜻한 물과 과자를 먹이던 기빈이형(대학산악부는 성별 관계없이 선배를 형이라 부르는 전통이 있다)이 "아이젠은 차보고 내려가야지. 기다리게 하지마"라며 토닥였다. 호선이형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 대열에 끼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다 같이 정상에 올라가자던 말을 했었는데 벌써 무너지고 말았다. 가이드가 하는 말이 "미안하다"며 "내려가라"고 한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꾹 참고 조금만 더 가면 안 되냐고 했지만, 나의 느린 속도는 팀원들 전체에게 피해였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고민이 엄청 많았다. "오케이"라고 내뱉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앞에 가던 팀원들에게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내려가는 길에서야 풍경이 보였다. 해가 뜨면서 지금껏 보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풍경을 보며 내려가는 내내 온갖 후회 거리들이 생각나며 눈물이 났다. '국내에서 훈련을 더 열심히 할 걸, 물을 더 많이 마실 걸'하는 후회가 끝없이 맴돌았다. 내 부족한 체력의 한계였는지, 이겨내지 못한 고소 증세 때문인지 오늘만 기다렸는데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내려가면서 식량 담당인 내가 새벽 출발 전 팀원들을 잘 먹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다시 눈물이 터졌다. 내려가는 내 배도 이렇게 고픈데 올라가고 있을 팀원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에 미안했다. 홀로 텐트에 돌아와 새벽에 미처 자지 못했던 잠을 몰아 잤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복잡했던 머리가 잠잠해졌다. '우리 팀은 지금 어디쯤일까?' 무전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여기는 조현세. 여정윤 감잡아라."

12시쯤 대장에게서 무전이 왔다. 아쉽게도 동기인 수지가 내려갈 거라는 무전이다. 그때부터 오매불망 물을 끓이며 수지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물이 차가워지면 다시 데우기를 반복했다. 멀리 노란색 가방과 바지가 보였다. 수지였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대원을 보니 너무 반가워 서로의 정상 공격 무용담을 풀었다.

이제는 정상등정 무전만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게 없다. 이 머리가 깨질듯한 곳에 아무것도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다보니 무전하나가 소리쳤다.

정상에 오른 조현세 대장과 문기빈, 이호선 대원. 

"여기는 조현세. 캠프3 감잡아라."

"현 시간 다우악(동아대산악회 별칭)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저 멀리 파란 패딩을 입은 두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조현세 대장과 호선이형이었다. 웃으면서 내려오는 걸 보니 아픈 데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기빈이형이 상태가 좋지 않아 같이 천천히 내려오다가 마지막쯤 헤어졌다고 했다.

멀리 기빈이형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산소마스크까지 끼면서 내려오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정상 공격 전까지 크게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스크를 벗으니 얼굴이 늙어 보인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1월 12일, 이제 모두 마쳤다.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야 한다. 모든 짐을 다 싸고 마지막으로 텐트를 회수하려고 기빈이형과 정리하고 있었다. "형 텐트 날아갈 것 같은데요."라고 하자, "괜찮아 안날라가"라고 말했으나, 순식간이었다. 텐트 플라이를 걷는 순간 고정이 풀리면서 텐트 이너가 바람에 굴러가버렸다.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 이 상황에서, 날아가는 텐트를 잡기는 버거웠지만, 못 잡으면 큰일 난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다행히 잠시 바람이 멈춘 순간 텐트를 잡았다. 폐가 터지는 줄 알았다. 졸업생 선배들이 떠나기 전, 텐트 안 날라가게 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말로만 듣던 상황이 일어나니 어이가 없어서 바닥에 그대로 누워 둘이서 웃기만 했다.

베이스캠프에서 기념 사진 시간. 인도에서 온 등반팀 대원과 함께 했다.  

오늘은 너무 춥다. 발가락이든 손가락이든 이대로 두면 동상에 걸릴 것 같아서 캠프2로 내려가면 안 춥겠지하는 생각에 미끄러지든 말든, 넘어지든 말든 최대 속도로 내려갔다. 캠프2로 내려가도 할 일이 많다. 캠프2에 있는 텐트와 짐까지 다 회수해야 했다. 전날 정상 공격까지 다녀왔는데 하루에 고도 1700m를 내리려니 너무 지쳤다. 아마 다들 오늘이 제일 지치는 날이었을 것 같다.

베이스캠프까지 왜 이렇게 먼 지 모르겠다. 우리보다 훨씬 늦게 출발한 포터들이 뒤에서 뛰어내려와 우리를 제쳤다. 30kg 이상씩 메고도 가파른 산을 뛰어 내려가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등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베이스캠프 텐트 안에 누웠다.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온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다시 하이캠프로 가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1월 14일, 다 같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베이스캠프 철수에 급급했다. 멘도사라는 도시까지 한 번에 내려가야 하기에 서둘러야한다. 텐트를 접고 개인 배낭까지 다 싸고, 행정 처리를 하고 있으니 잉카 업체 직원들이 하나 둘 마중 나오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 생활이 길다 보니 붙임성 좋은 대원들과 현지 직원들은 정이 쌓였다. 우리 텐트를 보수해주던 옆 텐트 포터와 식당 쉐프, 항상 음식을 서빙해주던 직원 등 마지막 인사를 하기 바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인사를 나누니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엔딩 장면 같았다. 20일 간의 산 생활이 꿈같이 느껴진다.

현지 가이드들과 떠나기 전 단체 사진을 찍었다.

베이스캠프를 뒤로 하고 도시로 향했다. 내려가면서 베이스캠프로 올라왔던 날의 많은 추억이 스쳐갔다. 조벽래 선배를 만났던 곳을 지나고, 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었던 곳을 지나고, 기빈이형이 물에 빠져 발 한쪽이 모두 젖었던 곳도 지났다. 하이캠프에선 보이지 않던 반가운 뮬라들이 보인다. 뮬라는 말과 당나귀가 섞인 교배종으로 짐을 나르는 역할을 한다. 이제야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사람들도 마주친다. 예전의 나와 같이 설렘을 안고 올라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입에서 "Good luck(행운을 빈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도시에 내려와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텐트가 아닌 숙소의 포근한 침대에 누웠다. 정말 다 끝났다는 게 느껴진다. 후회가 많다. 하지만 가슴에 깊이 남겨 두지는 않을 거다. 이곳엔 참 괴물 같은 대단한 등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정상에 미치지 못한 건, 산이 온전히 나를 평가했을 때 더 노력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나를 내려 보낸 것이다. 원정은 끝났고, 나에겐 더 노력할 이유가 생겼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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