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28층에 내걸린 SOS…20시간 갇힌 노인 살린 눈썰미
인천의 한 아파트 대피 공간에 갇혀 있던 70대 남성이 20시간 만에 구조된 사연이 뒤늦게 알려졌다. 남성이 28층에서 보낸 ‘구조 신호’와 이를 놓치지 않은 이웃의 눈썰미 덕분에 경찰이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경찰청은 지난해 12월 인천 도화동의 한 아파트에서 70대 남성 ㄱ씨를 구조한 일을 29일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소개했다. 지난해 12월1일 낮 1시 인천경찰청 112 치안 종합상황실에는 “인천의 한 아파트 맞은편 동 외벽에 ‘에스오에스’(SOS)라고 적힌 종이와 밧줄이 걸려 있다”는 다급한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신고자인 30대 여성 ㄴ씨가 상황실 근무자에게 보낸 사진엔 고층 아파트 창문에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SOS’라고 적은 종이가 걸린 모습이 담겨 있었다. 최단 시간 안에 출동해야 하는 ‘코드1’ 지령을 상황실로부터 전달받은 미추홀경찰서 도화지구대 소속 경찰관 7명은 순찰차 3대에 나눠 타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임용훈 미추홀경찰서 도화지구대 팀장은 30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처음 신고가 들어오고 20∼30분쯤 뒤 종이의 위치가 아까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는 신고가 한 차례 더 들어왔다. 출동하면서도 긴가민가 했지만 강력범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출동 가능한 인원이 모두 현장으로 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종이가 걸린 고층을 올려다봐도, 밖에서는 정확히 몇 층인지 알기 어려웠다. 몇몇 경찰관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나머지는 15층부터 세대마다 초인종을 눌러 가며 구조 요청자를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 바로 응답했지만 28층 한 세대만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경찰관들은 관리사무소를 통해 28층 세대주 아들의 연락처를 파악해, 아들을 통해 알아낸 비밀번호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한다.
안방과 화장실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지만 주방 안쪽에서 “여기요, 여기요”하는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이 났을 때 몸을 피하는 대피 공간이었다. 경찰관들은 고장이 나 열리지 않는 손잡이를 파손한 끝에 방화문을 열었다. 2평(6.6㎡) 남짓한 좁은 공간엔 속옷만 입은 70대 남성 ㄱ씨가 갇혀 있었다.
ㄱ씨는 경찰에 “환기를 위해 대피 공간에 들어갔다가 안에서 방화문이 잠겨 전날 오후 5시부터 20시간 넘게 갇혀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 당시 ㄱ씨의 휴대전화는 안방에 놓여 있었다. 경찰은 ㄱ씨가 이 집에 혼자 거주하고 있고, 다른 곳에 사는 아들이 가끔씩 들여다보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ㄱ씨가 주변에 있던 검은색 상자와 칼, 줄 등을 활용해 외부에 구조 요청을 보낸 덕분에 더 늦지 않게 구조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ㄱ씨는 상자의 검은색 종이 부분을 칼로 긁어내 ‘SOS’라는 글자를 만든 뒤, 이를 줄에 연결해 창문 밖에 내걸었다고 한다. 또 라이터를 계속해서 껐다 켜며 불빛을 이용한 구조 신호도 보냈다.
“할아버지, 괜찮으시냐”는 경찰관의 말에 ㄱ씨는 “추워서 얼어 죽을 뻔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라”는 경찰관의 말에 “그 정도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임용훈 팀장은 “경찰관들이야 당연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지만, 신고를 해 주신 맞은편 동 거주자 ㄴ씨에게 특히 감사하다. 출동을 해서도 아래에서 내려다봐서는 종이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비슷한 층에 사는 신고자가 유심히 본 덕분에 구조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어 “혼자 사는 분들은 집안에서 사소한 이동을 할 때라도 외부와 연락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가까이 두고, 출입문 비밀번호를 가족에게 미리 공유해 놓는다면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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