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6급 공무원이 된 탈북청년…“고향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04년 8월 백두산으로 자유여행을 떠났던 탈북청년 강원철에게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한국 국적을 따면 중국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은, 그가 중국에 숨어 지낼 때부터 가졌던 오랜 꿈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여권을 만들었고, 대학 입학을 기념해 중국에서 함께 지냈던 탈북 친구와 함께 떠났다.
인천공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을 느껴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중국 연변에 도착하자마자 일부러 공안을 찾아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3년 전엔 공안 복장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줄행랑을 치느라 바빴지만, 한국 여권을 보여주니 경례까지 받았다. 삶이 하늘땅 차이로 바뀌었음을 체감하니 너무나 신이 났다.
다른 한국 관광객들과 함께 도문의 두만강에서 배를 타고 북한을 구경할 때였다. 건너편에서 삐쩍 마르고 헐벗은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강가에서 관광객들을 쳐다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부부가 강 씨와 친구를 보더니 “너희들은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저렇게 젊은 청년들이 너무 고생하고 있잖아”라고 말을 건넸다. 부부는 이들이 탈북 청년인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 씨는 북한 군인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북에 계속 살았다면 지금 저렇게 보내고 있었을건데….”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버스는 그의 고향 무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 떠날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고향땅을 건너다보며 강 씨는 아직 거기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나는 운이 좋아 한국에 와서 대학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외국 여행까지 다니는데, 아직 저기 살고 있는 똑똑했던 친구들은 저 땅에서 태어났다는 죄 하나로 얼마나 고생을 할까. 통일이 돼 고향에 돌아갔을 때 친구들이 ‘우리가 힘들게 살 때 너는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그의 고향에서 백두산은 차로 3시간 거리였지만, 북한에 살 때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백두산을 서울에 살게 됐을 때에야 비로소 가볼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도 그는 친구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통일이 돼도 그들에게 떳떳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그때부터 북한 인권문제에 천착했다. 지금 그는 통일부 6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의 궤적은 20년 전에 세운 목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직진 중이다.
●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 운명
북한에서 강 씨의 운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가 1982년 두만강 옆 함북 무산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무산광산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자라면서 학교에 갈 때마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창피했다. 북한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아버지가 당원인지, 비당원인지를 적어오라고 한다. 부모의 노동당 가입 여부에 따라 아이들 속에서도 계급이 나뉘었는데, 부모 모두 당원이 아닌 강 씨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평강 출신인 강 씨의 아버지는 북한군에서 10년 넘게 복무를 했지만, 당원이 되지 못했다. 제대 후엔 어렵고 힘든 무산광산 노동자로 발령이 나 연고도 없는 함북 오지로 오게 됐다. 강 씨가 13살 때인 1995년 아버지가 병사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출신성분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출신성분을 보면 아버지도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강 씨의 외할머니는 강원도 통천의 지주집 딸로 이화여전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외할머니는 종종 “현대 정주영 회장이 우리 동네에서 살았어. 참 못살았는데”라고 회상하곤 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강 씨가 대학에 갈 가능성의 거의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공병국 같은 곳에서 10년 동안 건설장을 전전하다가, 제대해 무산광산 노동자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의 고향은 무산읍에서 통근열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무산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집단부락 성격의 마을이었다. 모두들 가난했다. 탈북할 때 두만강에서 처음으로 헤엄을 쳤다.
그가 살던 4층 아파트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에서 가장 먼저 텅텅 빈 아파트로 꼽힌다.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자고 나면 사람들이 중국으로 도망쳐 사라졌다.
그나마 강 씨의 집은 동네에선 비교적 굶지 않고 사는 축에 속했다. 함경북도는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을 잘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강 씨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무산에서 중국 물품을 받아다 황해도 같은 앞쪽 지역에 나가 쌀을 바꾸어왔다. 그 덕분에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을 때 강 씨의 집은 풀죽이나마 먹고 살 수 있었다.
당시 강 씨의 학년은 40~50명 규모의 학급 5개로 구성이 됐는데, 고난의 행군 막바지에는 학년에서 학교에 나온 학생을 다 모아야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강 씨는 학교 때 공부를 잘해 간부를 도맡았는데, 학교에 가면 선생이 늘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찾으려 보냈다.
친구들 집에 가면 얼굴이 퉁퉁 부은 부모들이 맞아주었다. 그나마 그런 집은 부모가 굶어죽은 집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 어머니 장사 밑천 마련하려 탈북
1998년 강 씨는 졸업반이 됐다. 반 년만 있으면 군에 나가야 했다. 그때 어머니의 장사도 잘 되지 않아 집안이 힘들었다. 군에 나가 10년 있는 동안 어머니와 5살 아래의 여동생이 굶어죽지는 않을지 너무나 걱정이 됐다.
강 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중국에 건너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해 주기로 결심했다. 이미 학교는 문을 닫을 지경이었고, 학교에 나가지 않는 것이 정상일 때였다.
“입대하기까지 반년 남았으니 그동안 중국에서 일하면 인민폐 100위안은 벌어오겠지.”
16살 소년이 집을 떠난 동기는 단순했다.
당시만 해도 무산에는 국경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고, 특히 아이들은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통근열차를 타고 무산으로 간 그는 두만강 상류를 따라 걸어갔다. 군인들이 어디 가냐고 물으면 나무 하러 간다고 둘러댔다.
어둑어둑해졌을 때 그는 무작정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5월이라 두만강이 깊지 않았다. 강을 건너자마자 그는 두만강에서 초막을 치고 있는 조선족 남성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은 겉으론 고기잡이를 한다고 했지만, 실은 북한과 밀수도 하고, 여성들이 건너오면 팔아먹기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은 키가 작은 16살 소년이 쓸모가 있어보였는지 함께 움막에서 살자고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강 씨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해 3개월 동안 함께 지내며 농사를 거들어주었다.
이 기간 강 씨는 북에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돼 충격을 받았다. 조선족들은 대놓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욕했다. 그런데 강 씨가 듣기엔 그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북에 있을 때 강 씨는 고난의 행군이 날씨가 좋지 않아 흉작이 들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을 하나 건넜을 뿐인데 중국은 1년 농사해 3년을 먹고 살았고 이밥에 고기가 빠지지 않았다.
조선족들은 자주 그를 마을로 데려가 한국 TV와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 씨는 군에 가는 목적이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동포들을 해방하기 위해서라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TV 속 남조선은 너무나 풍요로웠다. 함께 있는 조선족 청년들도 한국을 침이 마르게 극찬하며 한국에 갈 꿈만 꾸고 있었다.
“내가 군에 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네.”
강 씨는 중국으로 건너온 지 3개월 만에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었다. 조선족 청년들은 돈을 주진 않았다. 강 씨는 시내에 가서 돈을 벌어 집에 보내주려고 결심했다. 조선족 청년들에게 차비를 빌린 그는 연길로 향했다.
● 북송 비행기에서 느낀 행복
키 작은 16세 소년이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교회들을 다니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당시 연변의 교회들엔 그와 비슷한 신세의 탈북민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 그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탈북 소년들을 알게 됐다. 어쩌다 보니 30대 탈북청년 한 명과 10대 또래 청소년 3명이 한 팀이 돼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됐다.
30대 형이 늘 이들에게 “남조선에 가면 배고프지 않고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목표는 한국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몰랐다. 이들은 막연하게 중국 항구에 가서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몰래 타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다보니 이들의 행선지도 중국의 항구도시를 향하게 됐다. 처음 대련에 가서 항구에 정박한 수많은 배들을 보며 “저걸 어떻게 탈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시 이들은 상해로 향했다. 상해는 훨씬 더 큰 도시니 거기에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해를 넘겨 1999년 6월 상해에 도착한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러 한인교회를 찾아 들어갔다. 당시에는 탈북민들이 상해까지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교회에 들어간 직후 공안이 들이닥쳐 이들을 체포했다.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말을 나눈 조교(북한 국적을 가진 조선족)가 이들을 신고했던 것이다.
김일성대를 졸업했다는 공안이 들어와 이들을 심문했다. 처음에는 조선족이라고 우겨도 봤지만 그때마다 가혹한 매질이 가해졌다. 강 씨가 조사실에 들어갔을 때 여러 명의 공안이 달라붙어 그를 거꾸로 세우고 발로 마구 때렸다.
이들에게서 탈북민이란 자백을 받은 공안은 다음날 4명을 차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큰 식당 앞에서 차가 멈췄다. 그리곤 이들에게 호화로운 점심을 먹였다. 강 씨는 태어나 그렇게 좋은 식당을 처음 봤다. 큰 원형 테이블에 음식을 가득 올려놓고 실컷 먹었다.
점심을 먹은 뒤 공안이 다시 이들을 차에 태우고 가면서 “이제 너희들은 비행기를 타고 단동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강 씨는 속으로 “범죄자를 비행기를 타게 한다는 것이 말이냐 되냐”고 생각했지만, 차는 실제로 어느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태우기 전엔 수갑도 풀어줬다.
강 씨는 잠깐이나마 북송의 공포에서 벗어나 너무 행복했다.
“나는 비행기를 타봤으니 성공한 인생이구나. 이젠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비행기에선 기내식까지 주었다. 비행기에서 주는 빵이 너무 비싸 보여 아끼느라 품속에 몰래 감추었다.
2시간 지나 비행기는 단둥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중국 변방대 군인들은 상해 공안들과 달리 이들을 거칠게 대했다. 강 씨는 숨겼던 빵을 빼앗길 때 들었던 아까웠던 마음을 오래오래 기억했다. “그냥 먹을 걸….”
● 자고나면 사람이 죽었다
단둥에서 일주일 정도 수감생활을 마치고 이들은 신의주로 송환됐다. 다행히 신의주 보위부는 어른들에게 관심이 있었지 17살 청소년은 혹독하게 취조하지 않았다. 그때는 고난의 행군 직후라 강 씨처럼 중국에서 구걸하다 잡혀온 아이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이들 4명은 중국에 갇혀 있을 때 한국으로 가려던 것, 교회에 갔던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걸 말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보위부 조사가 끝나 신의주 집결소로 이동했다. 이곳은 신의주에서 1차 심문을 끝낸 탈북민들이 살던 지역으로 호송되기 전 머물며 하루 12시간 이상씩 강제노동을 하는 곳이다. 그가 갔을 때 300~400명이 수감돼 있었다. 강 씨는 집결소로 가기 전 일이 힘들 것보단 빈대가 더 걱정이 됐다. 그만큼 신의주 집결소는 빈대가 많기로 소문이 났는데, 강 씨는 빈대에 약한 체질을 갖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강 씨는 이 곳에 하루만 머물렀다. 마침 다음날에 함경북도 호송원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강 씨는 수십 명과 함께 수갑을 차고 열차에 올랐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함북 청진의 농포집결소였다. 이곳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도 내 각 군에서 호송원들이 오길 대기하는 것이다.
그의 고향 무산은 청진과 기차로 불과 3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산에서 호송원이 오지 않았다. 안전원들이 호송이란 귀찮은 출장이 싫어 서로 미루다보니 집결소에 온 많은 탈북민들은 기약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엔 혹독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강 씨도 벽돌을 찍고, 시멘트를 만들고, 풀을 뜯는 따위의 일에 내몰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더러는 복도에 앉아 자야 했다.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기 때문에 이곳에선 반 년 이상 버티기 어렵다. 강 씨가 있던 5개월 기간에도 농포집결소에서 13명이 영양실조로 죽었다. 강 씨 옆에서 자던 사람이 아침에 시체로 발견돼 끌려 나간 일도 있었다.
시신들은 집결소 마당에 거적으로 덮어 방치해 둔다. 식사 시간이면 안전원이 나와 시체들을 가리키며 “조국을 배신한 놈들은 이렇게 죽어도 싸다”고 일장 훈시를 했다.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면 수감자 중 몇 명을 불러내 손달구지에 시신을 싣게 한 뒤 뒷산에 올라가 대충 묻어버린다. 집결소에선 이걸 ‘직파’한다고 말했다. 시신을 깊이 묻지 않아 큰 비가 오면 산 여기저기에서 유골들이 노출돼 뒹군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 어머니도 몰라본 아들의 모습
기다리던 무산 호송원은 11월 말이 돼서야 나타났다. 이 때쯤 강 씨도 영양실조에 걸려 더는 운신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 달만 더 있었더라면 강 씨도 뒷산에 직파될 뻔했다.
무산으로 가는 탈북민들과 함께 열차에 탔을 때 강 씨는 도망갈 기운도 없었다. 다행히 집결소에서 알게 된 무산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북송된 지 얼마 안 돼 기력이 남아있었다. 그는 귓속말로 “내가 가다가 틈을 타서 도망칠 것이니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곤 정말 밤중에 열차에서 뛰어내려 강 씨의 집을 찾아갔다.
다음날 강 씨 일행은 무산역에 내렸다. 이들은 다시 무산군 집결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어머니가 나타나 아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네 친구한테서 네가 잡혀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길에 나갔어. 그런데 사람 몰골이 아닌, 여름옷 차림의 새까만 맨발의 무리가 나타나 머리를 숙이고 지나갔어. 내 아들이 저기 있는데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겠는 거야. 일행이 지나가고, 다시 뒤돌아서 한 명 한 명 뜯어보았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강 씨는 뼈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여름에 체포됐을 때 입었던 옷을 6개월 내내 입고 온갖 험한 일에 내몰렸기 때문에, 옷을 입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온 집안 재산을 다 털어 안전부에 뇌물을 주었다. 강 씨는 성인도 아니었던 터라 뇌물이 쉽게 먹혔다. 집결소에 끌려간 다음날 그는 바로 병보석을 핑계로 집에 왔다.
이후 3~4개월 동안 몸이 부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잠을 잘 때엔 집결소의 악몽이 떠올라 가위에 눌렸다. 보위부에선 수시로 찾아와 그가 집에 있는지 감시하고 갔다.
● 몽골을 거쳐 한국에 입국
2000년 봄이 왔다. 무산에 USA라는 글씨가 붙은 옥수수 마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강연을 통해 “우리 장군님의 배짱에 미국 대통령이 납작 엎드려 빌었고, 미국을 살려주는 대가로 식량을 바치고 있다”고 선전했다.
북한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1년 넘게 지낸 강 씨는 이것이 모두 거짓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몸이 회복되자 그는 다시 중국으로 갈 생각을 했다. 이미 외부세계를 경험한 그는 북한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중국에서 일하며 벌었던 돈이 3000위안 있는데 그걸 찾으러 가야겠다”고 말하곤 집을 나섰다. 중국에서 살면서 아는 사람들도 생겼기 때문에 이번에 넘어가면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시 예전처럼 두만강을 넘은 그는 연길에 가서 한국 목사를 찾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이미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 목사를 만나 그의 보호를 받으며 은신처에 머물게 됐는데, 성경공부를 하면서 1년 정도 지냈다.
물론 완벽하게 안전했던 것은 아니어서 한 번은 중국 공안에 함께 공부하던 일행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은 대련 변방대 청사 6층에 수감됐는데, 밤에 남자들은 배수관을 타고 도망쳤다. 여성들도 다음날 돈을 주고 풀려났지만, 북에서 각각 과학자와 의사였던 한 노부부는 끝내 풀려나지 못해 북송됐다. 이들이 북한에 가서 얼마 안돼 사망했음이 나중에 탈북한 뒤 한국에서 한의사가 된 부부의 딸을 통해 알려졌다.
변방대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한 그는 교회가 운영하는 인근의 다른 숙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강 씨 숙소 사람들이 모두 잡혔다는 소식은 이곳에도 이미 전해졌다. 가뜩이나 긴장한 채 살던 이들은 강 씨가 문을 두드리자 창문에 밧줄을 드리우고 도망쳤다. 동네 사람들이 이걸 보고 신고하는 바람에 이들은 또 공안에 체포될 뻔했다. 한 친구는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는데, 그 상처는 몇 년 지나도 낫지 않았다.
이렇게 숨을 조이며 살던 와중에 다른 곳에 있던 한국 선교사가 “지금 한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들은 주저 없이 길을 나섰다.
2001년 2월 그는 6~7명의 탈북민과 함께 몽골로 향했다. 이때가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오는 루트가 개척되던 초기여서 중국과 몽골 국경 경비도 삼엄하지 않았다. 철조망 5개를 넘어 몽골 땅에 들어갔지만, 군인들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열차역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역무원에게 “울란바토르로 가고 싶다”고 하자 그제야 신고를 받은 군인들이 나타났다. 울란바토르에서 보름 정도 머무르다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두 번째 기내식은 빡빡 다 먹어치웠다. 2001년 3월 강 씨는 그렇게 한국에 도착했고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9월 사회에 나왔다.
탈북민들은 서로 만나면 “하나원 몇 기냐”고 묻는다. 언제 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원이 생긴지도 올해로 25년. 매달 한 기수씩 배출되니 이제는 하나원 기수가 300기를 육박하는데, 강 씨는 하나원 13기이다. 이 정도면 빨리 온 것으로 따졌을 때 ‘레전드’급에 들어간다.
● 인권에 눈을 뜬 청년
강 씨가 처음 한국 사회에 나왔을 때 나이는 만 19세였다. 미성년자로 구분돼 임대주택도 받지 못하고 비슷한 또래의 탈북 청소년 2명과 함께 서울에서 천주교가 운영하는 한 직업학교 기숙사로 보내졌다. 이곳은 소년원 출신도 여럿 있는 등 학생들이 대개 거칠었다. 이들과 탈북 학생들은 자주 싸웠다. 한동안 싸우다가 나중에 싸우면서 정이 들어 친해졌다.
아이들은 서로 “우리야 말로 진정한 남북통일을 했다”고 자부했다. 직업학교에서 1년 반 정도 머물며 강 씨는 선반기술을 배웠다. 돈을 벌어 가족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독한 마음으로 공부해 선반 2급 자격증 등을 따냈다.
2003년 3월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한 금형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이 차별이었다. 그가 일하는 회사엔 동남아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공장 사람들은 강 씨도 외국인과 똑같이 취급했다. 당당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강 씨는 적잖게 상처를 입었다.
그는 대학에서 공부를 해야 몸값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 6개월 만에 공장을 그만두었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번 돈을 악착같이 모아 북한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한국에 데리고 온 것이다. 공장을 그만 둔 강 씨는 열심히 대학준비에 매진해 이듬해 한양대 경영학과에 했다.
대학생활을 막 시작하려던 때에 시민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연락이 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하는데, 여기에 참가해 북한 인권을 증언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그가 한국에 올 때 비용을 지불해 준 인연이 있었다. 스위스에 로비를 하러 떠나는 대표단 10명 중 강 씨 혼자만 탈북민이었다. 이미 가족도 한국에 와 꺼리길 것이 없었던 그는 선뜻 응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세계 각국 대표단을 상대로 자신이 북한 집결소에서 겪었던 참혹한 실상을 증언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인권이란 개념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세계인권선언문을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강요당하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더구나 북한이 유엔인권이사회에 가입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가 겪은 북한은 인권선언문의 조항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곳이었다.
몇 달 뒤 떠난 중국 배낭여행은 인권에 눈을 뜬 그에게 목표를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파란 여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짐승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한 그는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북한 인권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대학에서 북한인권동아리를 만들었고, 다른 대학의 북한 인권 모임과 연계해 각종 캠페인과 세미나를 열었다. 나중엔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을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보니 대학 졸업도 늦어 2010년에야 졸업증을 받았다.
● 이상과 현실 사이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3년 동안 민간단체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로 옮겨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잡지 발간 일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한 인권단체들은 열악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월급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강 씨는 고향을 바라보며 친구들을 향해 다졌던 맹세에 충실하려 애썼다. 2013년엔 고려대 북한학 석사 과정에 입학해 2017년 석사학위도 받았다.
북한 인권을 알리는 활동도 계속 이어나갔다. 2014년 8월 15일 탈북청년 40명이 가수 이승철과 함께 독도에서 ‘홀로아리랑’과 ‘그날에’를 합창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당시 이 행사를 기획한 탈북청년연합 ‘위드유’의 사무국장이었다.
하지만 사명감 하나로 버티기엔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2015년 1월 그는 돈도 벌지 못하는 자신을 묵묵히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던 탈북민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곧 아이도 생겼다.
이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취직을 생각했고, 2015년 하나은행 입사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
연수와 고려대 지점 생활을 거치며 서서히 은행원의 삶에 익숙해갈 무렵 그는 통일부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공무원 모집을 한다는 공고문을 보게 됐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통일부에 가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월급을 받으며 할 수 있는 것이다.
통일부는 박근혜 정부 시절 탈북민에게도 일부 채용의 문을 열었는데, 2016년 12월 그가 지원했을 때가 두 번째 공고였다. 탈북민 중에서 석사 이상 학력의 7급 공무원 1명과 9급 공무원 2명을 모집했다. 많은 탈북민이 지원해 경쟁이 나름 치열했는데, 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강 씨가 선발됐다.
● 통일부에서 만들어가는 미래
2017년 초부터 그는 통일부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기엔 적지 않은 35살이었지만, 강 씨는 첫 출근이 너무나 흥분되고 설렜다.
“광화문 정부청사로 출근할 때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평양도 가보지 못했을 제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통일 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 돼 일하게 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고향에 가도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생긴 것 같은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자부심과 달리 신입 공무원 생활은 쉽지 않았다. 서무, 예산, 사업 등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라 낯설고 익숙하진 않았다. 부서도 자주 바뀌었다. 통일교육원에서도 일했고, 2021년엔 경의선 출입사무소에서도 일했다. 한산한 사무소를 지키며 그는 통일이 자신의 생각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그는 6급 주무관으로 승진했다. 탈북민 중에서 공무원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별정직이 아닌 공채 출신으론 6급이 현재 제일 높다. 지난해엔 통일부 장관상을 받는 등 부처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현재 강 씨는 통일교육원에서 공무원 대상 통일교육 담당 주무관으로 일하고 있다. 안내, 교육자료 작성 지원, 강사 일정 조율 등이 그의 일과다. 2019년부터 공무원 대상 통일교육이 법정의무교육이 됐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은 장점도 많다. 가정에 돌아와서도 딸 둘의 재롱을 보며 행복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활동가형인 그에겐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된 공무원 생활이 완전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인터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기자가 직접 통일부에 정식 요청을 넣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통일돼 고향에 돌아가는 날만 꿈꾸고 삽니다. 오늘 열심히 배워 통일된 뒤 북한에 행정조직을 만들 때 저의 경험을 살려 이바지하려 합니다. 저는 출근할 때마다 굶어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고향의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그것이 제가 하루하루를 사는 원동력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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