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품앗이·관계적 복지·협동조합…시장경제 넘는 대안 모색
⑤ 곳곳서 싹트는 또 다른 안심마을들
새해 들어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재개발·재건축에 관한 규제를 아주 확 풀어버리겠다”고 했다. 부동산의 숱한 가치 가운데 사적 재산권과 그 증식만이 절대적 가치라는 선언으로 들린다. ‘공터 사회적협동조합’은 이 선언에 반한다. 안심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건물을 짓고 함께 쓰면서 부동산 공유화를 애면글면 꾀하지만, 윤 대통령의 악센트가 실린 부사 ‘아주’와 ‘확’은 안심마을 사람들의 집합행동을 가차 없이 일축한다. 그들이 의도치 않더라도, 그 자리가 바로 안심마을의 최전선이다.
“부동산 규제 확 풀겠다”는 윤 정부
그 대척점엔 안심마을이 좇는 가치
기울어진 운동장이지만 섬은 아냐
윤 대통령이 대변하는 가치와 안심마을 사람들이 좇는 가치는 힘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지대 추구는 민낯을 가릴 필요도 없는 이 시대의 가장 강렬한 욕망이다. 그렇다고 안심마을이 완전히 고립된 섬은 아니다. 마을의 형상과 생성의 힘이 대구 동쪽 끝자락의 지리적 기반을 넘어섰다는 건 안심마을 사람들의 꿈과 행동 또한 이미 탈지리적이라는 걸 암시한다. 실제로 수많은 안심마을‘들’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출현해 시장경제의 다양한 대안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에는 ‘후레아이 깃푸’(돌봄 티켓)라는 지역 협동조합들이 있다. 노인 돌봄을 품앗이하는 네트워크다. 원리는 항공권 마일리지를 닮았다. 한 조합원이 다른 조합원에게 돌봄을 제공하면 그 시간만큼 포인트가 적립된다. 적립된 포인트는 자신과 가족이 돌봄을 받는 데 사용한다. 요코하마에서는 노인 돌봄뿐 아니라 어린이집 같은 데서도 쓸 수 있다.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서 그곳 가족이나 친구도 쓸 수 있는데, 심지어 대양을 건널 수도 있다. 미국과 유럽의 몇몇 도시에 지사가 있는 덕분이다.
일본 노인 돌봄 품앗이 ‘돌봄 티켓’
돌봄 제공 뒤 필요할 때 돌려받아
후레아이 깃푸는 정부나 시장의 돌봄보다 훨씬 수준 높은 신뢰 관계와 사회적 유대를 형성한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대부분의 돌봄 수혜자들은 현금 지원보다 후레아이 깃푸를 선호한다. 또 돈으로 매개되는 기존 체계와 비교할 수 없는 유대감과 호혜적 태도가 형성된다. 돌봄을 주고받는 회원끼리 가족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다. 이런 체계에서 돌봄 수혜자는 더는 서비스 신청자나 구매자가 아니다. 사회적인 유대를 창출하는 참여자다.(존 레스타키스, ‘시민권력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참조)
후레아이 깃푸는 봉사활동을 시간적 가치로 환산해 교환하는 ‘타임뱅크’(시간은행)의 모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타임뱅크는 봉사자와 수혜자의 호혜적인 활동을 지향한다. 모든 사람의 노동이 동등하다고 간주하며, 시장경제가 무너뜨린 가정과 지역사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타임뱅크코리아 누리집 참조) 타임뱅크는 30여 나라에서 50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빠르게 확산했다. 실업률이 오르면 타임뱅크 가입률도 오른다고 한다. 봉사활동이 결코 ‘탈정치적’이지 않음을 하나같이 시사한다.
사회적 기업가 힐러리 코텀 새 접근법
사람 잇는 ‘관계적 복지’로 전환 주창
사회활동가이자 사회적기업가인 힐러리 코텀은 ‘베버리지 보고서’로 상징되는 20세기 복지에 종언을 고하며, ‘관계적 복지’로의 전환을 주창한다. “새로운 접근법의 중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맞닿음, 즉 연결이 있다.”(코텀, ‘래디컬 헬프’) 코텀은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는 자연스러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안에 자리를 잡고 일상의 관점에서 문제와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런 전환을 “우리 시대에 맞는 우리 식의 고유한 혁명, 대변혁”으로까지 평가한다.
과연 돌봄과 복지 체계를 전환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협동조합과 지역사회 조직가인 존 레스타키스는 이에 관한 정치적 전망과 효과를 이렇게 짚는다. “사회적 경제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돌봄과 협동의 가치는 현재의 망가지고 불안정한 사회를 재건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줄 사회를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 국가의 역할을 재정의하려는 노력 대부분이 사회적 돌봄 자체의 개혁으로 집중됐고, 돌봄 개혁은 사회적 돌봄을 통제할 권한을 시민 공동체에 돌려줌으로써 이뤄졌다.”(위의 책)
경제학에서 사회적 돌봄은 ‘관계재’다. 개인 간의 실제 관계를 기초로 하고, 당사자들의 결합 행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뜻이다. 관계재는 성실함이나 진정성 같은 관계의 질 자체가 가치의 핵심을 이룬다. 익명의 대상에게 일회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는 충족할 수 없다. “익명의 대상자들은 서비스에 대한 선택이나 통제권을 박탈당했다. 국가의 복지 프로그램은 수많은 하층 계급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됐다.” 레스타키스가 사회적 돌봄을 시장과 국가로부터 인간적·공동체적 가치로 재전유하는 것을 ‘민주화’라고 하는 이유다.
협동의 가치가 사회적 돌봄을 어떻게 다시 인간화하고 민주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사회적)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경제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중요하고 효과적인 대안으로도 꼽힌다. 전세계의 협동조합 수는 300만개가 넘는다. 여기에서 2억8천만명 넘는 사람이 일한다. 세계 인구의 10% 이상이 직간접으로 생계를 협동조합에 의존한다. 이탈리아에는 1만4천개가 넘는 사회적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고, 고용된 사람 수도 38만명이 넘는다. 북부 볼로냐에서는 의료와 사회적 돌봄의 85%를 사회적협동조합들이 담당하고 있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의 활발한 기획과 실천은 ‘필요’에서 나왔다. 이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일찌감치 설명했던 이가 칼 폴라니다. 폴라니는 근대 이전에 인간의 행복 추구의 보조적 수단으로 사회 속에 묻혀 있던(embedded) 경제가 근대 이후 사회에서 뽑혀 나왔다(disembedded)고 분석했다. 이렇게 사회의 행복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시장 논리에 지배되면서, 고삐 풀린 경제를 사회 속에 되묻으려는(re-embedded) 사회적인 자기방어가 자생적으로 일어난다. 폴라니는 그 작용과 반작용을 ‘이중운동’이라고 정식화했다.
사회적 경제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는 얼마든지 더 있다. 표트르 크로폿킨은 동물 종의 생존전략을 연구한 ‘상호부조: 진화의 요인’(1902)에서 동물은 종 안에서 서로 돕는 것이 일반적인데다가, 상호부조가 잘되는 종일수록 높은 수준의 진화로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여성 최초로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럼은 공유재에 관한 주류 경제학의 오랜 주장(‘공유지의 비극’)을 실증 연구로 뒤집었다. 정부와 시장 중심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자치를 통해 공유재를 오히려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확인시킨 것이다.
협동조합, 경제 민주화 대안으로 꼽혀
사회적 경제의 실험, 지방선거로 확장
바르셀로나 시장 배출 시민참여 진일보
그래서 사회적 경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건가? 2015년 5월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아다 콜라우가 바르셀로나 시장에 당선됐다. 그는 ‘바르셀로나 엔 코무’(모두의 바르셀로나)의 후보였다. 바르셀로나 엔 코무는 주택담보대출(모기지) 피해자들의 강제 퇴거를 막는 직접행동을 벌이던 주거권 단체 등이 참여한 지역 연합정당이었다. 콜라우 시장은 사회적 경제 활성을 위한 정책을 강도 높게 펼쳤다. 2년 만에 카탈루냐 생산자조합연맹에 가입한 협동조합 수가 32%나 늘었다.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한 디지털 플랫폼을 열어 시민 참여 수준을 20배나 높이기도 했다.
재선에 성공한 뒤 3선에 도전했던 콜라우는 지난해 5월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러나 세상을 손쉽게 ‘아주 확’ 바꾸려고 하는 건 안심마을 사람들의 방식도, 바르셀로나 엔 코무의 방식도 아니다. 덩굴 식물과 뿌리줄기 식물의 방식을 그들은 좇는다. <끝>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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