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의 낙수효과’는 이미 깨진 신화다

한겨레 2024. 1. 30.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민편집인의 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정임│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영국 킹스칼리지런던대 데이비드 호프와 줄리언 림버그 교수는 2022년 1월 ‘소시오이코노믹 리뷰’에 ‘주요 부자 감세의 경제적 결과’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18개 나라가 50년(1965~2015) 동안 부유층의 세금을 줄여준 결과를 분석한 내용이다.

결론은 이렇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등 보수파 정부가 줄기차게 외친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s)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세금을 줄여줘도 그 혜택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현상’은 없었다. 경제 성장과 일자리 증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반대로 상위 1% 부자들이 국민소득에서 가져가는 몫이 늘어나는 등 불평등은 심해졌다. 이 논문은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나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연구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론만 있고 실증은 없는 ‘감세의 낙수효과’를 관에 넣고 못질한 것으로 보였다.

두 교수가 2020년 워킹페이퍼(의견수렴용 초안)를 발표한 이후, 각국에서 수십만명이 이 논문을 온라인으로 내려받았고, 미국 시비에스(CBS) 등 주요 언론이 보도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동향에 깜깜하거나, 알고도 무시하는 것 같다. 2022년 이후 종합부동산세와 법인세 경감,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대주주 기준 10억→50억원 상향 조정,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추진 등 ‘부자감세 행진’에 여전히 낙수효과를 내걸고 있으니 말이다. 2025년 시행 예정이던 금융투자소득세는 주식거래 등으로 연 5천만원 넘게 버는 소수가 대상이다. 이런 고소득자의 세금을 없애려 하면서, 정부는 ‘결과적으로 모든 주식투자자가 득을 본다’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실증적 근거는 없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에 낙수효과가 없었다는 연구는 있다. 근거 없는 믿음, 그것을 우리는 신화(myth)라고 부른다.

그런데 많은 국민은 정부 설명을 ‘그런가 보다’ 하는 것 같다. 다수 언론이 비판 없이 보도한 탓일 것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감세 공약이 쏟아지자 우려하는 언론도 있지만, 정부 논리를 그대로 받아쓰는 신문·방송이 더 많다. 일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기업들 저평가 현상)를 없애기 위해 상속세를 낮춰야 한다’는 대통령 발언까지 열심히 뒷받침해준다. 능력 있는 계층의 세금을 깎아준 뒤 나라 살림은 무슨 돈으로 꾸릴 것인지, 집요하게 따지는 언론은 많지 않다.

‘감세하되 건전재정도 하겠다’는 정부 의지는 지출을 조이는 방식으로 2024년 예산안에 반영됐다. 연구개발(R&D) 예산이 2023년보다 4조6천억여원이나 깎여, 젊은 연구자들이 무더기로 일자리를 잃게 생겼다. 교육 예산이 6조2천억여원 줄어 각급 학교 프로그램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국내 농어업·제조업 등은 이주노동자 없이 돌아갈 수 없는데도, 이들의 적응을 돕는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는 예산 삭감으로 대거 문을 닫게 됐다.

기업주와 부동산·주식 큰손을 위해 젊은 연구자, 학생, 취약 노동자에게 피해를 주는 정책을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불평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저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 즉 추가 수입을 소비에 쓰는 경향이 고소득층보다 크기 때문에, 중·저소득층의 소득이 정체되면 내수 경기가 가라앉는다’고 말한다. 2023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4%로 2021년 4.3%, 2022년 2.6%에 이어 3년 만의 최저치였다. 여기에 부자감세와 불평등 심화 영향은 없었을까.

에마뉘엘 사에즈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 등은 저서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에서 “우리가 선거로 뽑은 대표자들이 소수 기득권층의 수입을 올려주기 위한 방향으로 조세 제도를 바꾸고 있다면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념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이미 깨진 낙수효과 신화를 붙들고 정부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한겨레는 누구보다 날카롭게 감세 정책을 비판해왔지만, 학문적 결과 등 정확하고 입체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시민을 ‘똑똑한 유권자’로 만드는 일에 더욱 분발해주길 바란다. 활자와 친하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라고 외면하는 이들을 위해 영상과 인포그래픽, 소셜미디어로 다가가 ‘감세의 진실’을 알리는 노력도 더해주면 좋겠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