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밀레이 ‘자유지상주의 처방’, 아르헨 경제 고질병 고칠까

박병수 기자 2024. 1. 3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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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대통령 집권 50일 ‘충격 요법’ 논란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26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추모회 행사를 마친 뒤 돌아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극우 성향의 비주류 정치인에서 단숨에 권력의 최정점으로! 지난달 10일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권좌에 오른 지 29일로 50일이 됐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초인플레이션의 경제난에서 구해내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현재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말 그대로 최악이다. 지난해 물가는 211.4% 올랐고, 국내총생산(GDP)은 2.7% 줄어들었다. 실질 구매력은 한해 사이에 10% 넘게 줄었고, 국민 40%가 빈곤선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다. 정부 부채도 국내총생산의 80%에 이른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진 빚만 460억달러(약 61조원)에 이른다.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곧바로 세금 인상, 공기업 민영화, 규제 철폐, 시장의 자유 확대, 노동자 권리 축소 등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또 이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한 ‘입법권’도 요구하고 있다. 경제학자 시절부터 옹호해온 이른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정책을 통해 아르헨티나 경제의 오랜 악폐를 근절하고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밀레이의 자유지상주의 해법

밀레이 대통령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루이스 카푸토 신임 경제장관은 밀레이 대통령 취임 이틀 뒤인 지난달 12일 공식 페소 환율의 54% 평가절하, 전기·교통 보조금 축소, 공공 건설사업 계획 전면 취소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화폐 가치를 낮춰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정부 지출을 줄여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 지난달 20일엔 광범한 분야에 걸쳐 366개 조항으로 구성된 긴급 행정명령을 전격 발표해 32개의 법률과 6개의 행정명령을 폐지하고 31개의 법률을 개정했다. 아르헨티나 헌법은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기 불가능한 예외적인 경우” 정부가 의회를 거치지 않고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처에 따라 주택 임대료의 상한이 없어졌고, 특정 소비재에 대한 정부의 가격 통제도 사라졌다. 국영 기업의 민영화 금지법도 폐지돼 항공·철도·석유 등 국영 기업이 민간에 매각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 신입 직원의 수습기간을 3개월에서 9개월로 늘리고 해고 노동자의 법정 퇴직금과 산전·산후의 의무 임신휴가는 줄이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많이 축소했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24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 시위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달 26일엔 한걸음 더 나아가 헌법상 행정명령 대상이 될 수 없는 조세·사법·선거·정당과 관련된 664개 조항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광범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 ‘옴니버스 법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밀레이 대통령은 이 법안에서 ‘경제 분야에 대한 의회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해줄 것’을 요구했다. 기한은 2년으로 하되, 필요하면 2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해 사실상 임기 4년 내내 위기 극복을 빌미로 경제 분야에서 의회의 견제 없이 법을 마음대로 만들어 시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현재 주별 정당비례대표제인 하원의원 선거 방식을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등 선거법과 불법 집회와 시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3인 이상의 집회는 48시간 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집회 관련 법의 개정안도 제출했다. 이 밖에 최저 수출 세율을 15%로 일괄적으로 올리고 콩과 콩기름 등의 수출세는 현행 31%에서 33%로 인상해 세수를 늘릴 것을 제안했다. 공공사업의 민간자본 참여의 폭을 크게 넓히고 국영 석유기업(YPF), 국영 아르헨티나 항공(AA), 국영 철도(CA) 등 41개 기업을 ‘민영화 후보 기업’으로 지정하는 법안도 제출했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17일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밀레이 대통령은 이들 행정명령과 옴니버스 법안에 대해 경제난 극복을 위해 불가피한 ‘충격요법’이라며 다른 대안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대선 때 논란을 부른 중앙은행 폐쇄와 달러의 법정통화 도입 공약과 관련해선 당선 직후엔 “협상의 여지가 없다”며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다만, 이번 행정명령이나 옴니버스 법안에는 관련 내용을 넣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 “고통 떠넘기기” 엇갈리는 반응

밀레이 대통령의 충격요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에선 대규모 규제 완화 등의 조처로 장기적으로 시장 경쟁이 촉진되는 등 경제 활성화 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른 한쪽에선 단기적인 실업 증가와 경제활동 위축 등의 부작용으로 국민들의 삶만 더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밀레이 대통령과 그의 팀이 “(외환) 보유고를 다시 구축하고, 물가관리의 실책을 수정하고, 중앙은행의 재정 균형을 강화하며, 규칙 기반의 시장 지향적 경제를 창출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충격요법’을 긍정 평가한 것이다.

국내외 우파 인사들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이 2주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내놓은 ‘통제 없는 자본주의만이 빈곤을 줄일 유일한 모델’이라는 취지의 연설은 우파 인사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소셜미디어에 “무엇이 나라에 많이 또는 적게 번영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라고 환영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역시 밀레이 대통령이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지를 표했다.

반발도 만만찮다. 밀레이 정부 출범 이후 크고 작은 시위·집회로 저항하던 노동계는 한시 총파업을 시작했다. 전국노동자총연맹(CGT), 아르헨티나자치노동자연맹(CTA-A), 아르헨티나노동자연맹(CTA-T) 등 3개 단체는 지난 24일 공동으로 12시간 동안 한시 총파업으로 맞불을 놓았다. 이들은 밀레이 대통령이 “노동자와 중산층에게 일방적으로 고통을 떠넘기고 있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지속가능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법적 도전도 잇따르고 있다. 노동계·시민단체·재계 등 각계에서 정부의 행정명령에 대해 60건이 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역시 지난 3일 밀레이 대통령의 새 노동정책에 대해 “의회 동의 없이 허용될 수 있는지 본안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효력을 중지하라”고 노동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밀레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한 것이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2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 앞 광장에 모여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 집회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여소야대’ 의회 상황도 난관

‘여소야대’의 의회 상황도 우호적이지 않다. 밀레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범여권은 하원 257석 중 75석, 상원 72석 중 13석만 보유한 소수파에 머물고 있다. 이에 반해 제1야당인 페론주의 정당 ‘조국을 위한 단결’(UP)은 하원 102석과 상원 33석을 차지하며 범여권을 압도한다.

조국을 위한 단결은 밀레이 대통령이 내놓은 행정명령과 옴니버스 법안 등 대부분의 정책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중도 우파 등 중간지대 정당들의 광범한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의회에선 밀레이 대통령이 제출한 옴니버스 법안에 대한 심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야 간 이견으로 합의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밀레이 정부는 지난 27일 의회에 제출한 옴니버스 법안 가운데 야당의 반발이 거센 조세·연금 관련 부분을 제외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정부는 조만간 나머지 법안이 여야 합의로 하원을 통과해 상원으로 이송되길 기대하지만, 야당이 협조해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집권 초 밀레이 대통령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은 비교적 높은 국민적 지지다. 최근 한 여론조사를 보면, 대통령 지지도는 58%로, 지난해 11월 대선 지지율인 56%를 웃돌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 역시 집권 초 이런 국민적 지지를 한껏 활용하고 있다. 그는 “행정명령이 의회의 입법권 침해”라며 무효화를 주장하는 야당에 대해 “의회에서 과반수 표결로 무효화하면 국민투표에 부쳐 국민의 뜻을 직접 묻겠다”고 맞서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집권 초 허니문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밀레이 대통령의 정책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면 국민들은 참지 못하고 등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국제통화기금은 올해 아르헨티나의 경제 성장률이 지난해와 비슷한 -2.5%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의 충격요법은 신속히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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