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보다 더 무서운 '재해관련사'…골든타임은 한 달[딥포커스]
골든타임 버틸 수 있도록 피난소 인프라 미리 대비해야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일본 이시카와현(県) 노토반도를 뒤흔든 대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났다. NHK에 따르면 28일 오후 2시 기준 총 236명이 숨지고 1178명이 다쳤다. 주택 약 4만3766동이 무너지거나 파손됐는데, 이름이 공표된 사망자 중 90%는 주택 붕괴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 언론 보도 중 자주 눈에 띄는 표현이 있었는데, 바로 ‘재해관련사’다. 지진이나 쓰나미로 인한 직접적 피해로 숨진 것이 아닌, 재해 발생 이후 피난 생활 중 지병이 악화하거나 몸이 나빠져 사망하는 경우를 이르는 말로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계기로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일본은 대형 지진·쓰나미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직접사(直接死)와 재해관련사(災害関連死)를 구별해 집계한다. 단, 행방불명자는 재해관련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무너진 집보다 피난소에서 더 많이 죽었다
과거 일본의 재난·재해 사례를 보면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것은 직접사가 아닌 재해관련사였다. 마이니치신문은 2016년 구마모토 지진 사망자 총 273명 중 80%(226명)가 재해관련사였다고 보도했는데, 지진으로 인한 사망보다 4배나 더 많았다. 연령대별로는 70~90대 고령자가 전체의 80%를 차지했다. 기존에 질병 이력이 있는 기저질환자 비율은 10명 중 9명에 달했다.
일본 소방청에 따르면 2004년 발생한 니가타 주에쓰 지진은 전체 사망자 총 68명 중 52명(76%)이 재해관련사였다. 특히 이때는 피난소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장기간 차에서 숙식하며 소위 ‘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이라 불리는 심부정맥혈전증이 폐색전증으로 이어져 숨지는 경우도 보고됐다.
2019년 태풍 15호로 인한 인명피해 역시 재해관련사가 더 컸는데, 총 사망자 5명 중 3명이 이에 해당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3명은 모두 70대 이상 고령자에 해당했다.
이 밖에도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압도적인 쓰나미 피해로 직접사 비중이 더 높았지만 재해관련사 수도 3792명에 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자체별로는 후쿠시마현이 232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번 노토지진에서는 지난 28일까지 총 15명이 재해관련사로 눈을 감았다.
◇재해 발생 후 ‘한 달’이 고비…피난소 환경 미리 규격화 해놔야
재해관련사의 원인은 다양하다. BCPP에 따르면 크게 심적 스트레스·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피난생활 중 발병 등 3가지로 나뉜다. 재난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심각해지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데, 강진 후 잇따른 여진으로 급성심근경색을 일으켜 사망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이 재난 발생 후 폐렴으로 증세가 나빠지기도 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감염병 유행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재해관련사가 발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구마모토 재해관련사망자의 80% 이상이 지진 발생 이후 3개월 안에 사망했다. NHK에 따르면 1주일 안에 숨진 이의 비율이 24.3%, 한 달 이내로는 32.6%, 3개월 이내로는 24.3%였다. 동일본대지진 당시에도 재해 발생 후 1개월 이내가 745명으로 가장 많은 재해관련사가 보고됐으며, 이후 3개월 이내 683명이 추가로 숨졌다. 두 사례에서 보듯 초기 한 달이 대책 마련의 골든타임이다.
피난소 환경 역시 미리 제반 설비를 규격화해 정해둘 필요가 있다. 13년간 재해지 지원을 계속해 온 등산가 노구치 겐씨는 국제 ‘스피어 기준’을 강조한다. 스피어 기준은 약 26년 전 국제적십자가 아프리카 르완다 난민 캠프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정한 ‘최소한의 거주 공간’ 기준이다. 수면 및 공간 유지를 위해 1인당 최소 3.5㎡가 확보돼야 하며, 화장실 변기는 최소 20명에 1개꼴로 설치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재해관련사는 생각보다 단순한 요소로 발생한다. 최소 공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장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해 혈전이 발생하기 쉽고, 혈전은 곧 사망의 원인이 된다. 단수는 곧 화장실 위생 저하로 이어지며, 이는 개인의 수분 섭취 자제와 탈수 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니가타대학 소속 의사 한자와 가즈히코씨는 2016년 대지진을 겪은 이탈리아의 피난소는 지진 발생 72시간 이내에 가족 단위로 텐트와 침대가 지급됐으며 화장실도 위생적으로 정비돼 스피어 기준을 충족했다고 지적했다.
재해관련사의 다른 이름은 ‘구할 수 있는 생명’이다. 한국도 재난·재해 피해자가 놓인 열악한 환경이 곧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정기적인 대비책 점검과 제반 시설 확보가 필요해 보인다.
realk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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