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터뷰]임선애 감독이 알려준 '세기말의 사랑' 숨은 의미들
임선애 감독이 숨겨 놓은 의미들을 찾아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구절(나태주 '풀꽃')처럼 '세기말의 사랑' 역시 두 번 봐야 더 사랑스럽다. 보면 볼수록 임선애 감독이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의미들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임선애 감독 역시 "사람들이 두 번 봐야 더 재밌다더라.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다"며 웃었다. 흑백에서 총천연색 컬러 화면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영미(이유영) 신발의 색이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등에도 감독의 복안이 담겨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미의 세상을 둘러싼 다양한 원형의 오브제, 영미를 비추는 카메라의 각도 등 '세기말의 사랑' 안에는 임 감독의 세심함이 곳곳에 녹아있다. 영화와의 즐거운 술래잡기에 임한 관객들을 위해 임 감독에게서 몇 가지 연출 의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카메라가 영미를 비추는 방식
흑백으로 진행되는 1막 속 영미는 대부분 스크린의 중심이 아닌 어느 한구석에 치우쳐 있다. 영미의 삶은 늘 누군가를 위한 희생과 책임으로 가득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메라라 영미를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비추느냐에도 영미의 삶이 녹아 있고, 임선애 감독의 세심함이 담겨 있다.
임 감독은 "영미는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인물이어서 분절된 방식으로 보여줬다"며 "흑백 안에서도 영미는 계속 어떤 기하학적인 공간 안에 끼어있고,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미가 흑백의 세상 안에서 유일하게 타인과 수평적으로 놓여 있는 때가 바로 도영(노재원)과 있을 때다. 임 감독은 "내가 영미를 바라보는 거니까, 세상이 아니라 내가 영미를 바라보는 시선은 수평적이고 싶었다. 그리고 영미의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수평, 수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2막에서 컬러로 전환되며 출소하는 영미의 모습이 그려진다. 허허벌판과 같이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곳에 선 영미는 낯설고 불안하지만, 그를 방해하는 것은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영미를 계속 세상의 중심에 두고 싶은 마음에 앵글 배치를 중앙에 했어요. 미용 대회 후 유진과 처음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도 보면 비로소 수평적으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공교롭게 영미는 늘 입고 있던 카디건을 유진에게 입혀 줘요. 둘이 똑같은 혹은 똑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서 그런 식으로 했어요."
이처럼 임 감독은 촬영 감독과 콘티를 짤 때부터 꼼꼼하게 짰다. 점점 영미가 꽉 차는 느낌으로, 중심에 놓이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임 감독은 "콘티랑 거의 90% 비슷하다"고 했다.
"엔딩을 보면 영미의 얼굴은 오른쪽에, 유진의 얼굴은 왼쪽에 있어요. 이를 포개면 똑같아요. 일부러 좀 맞춰서 찍었거든요. 약간 데칼코마니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마지막에 클로즈업으로 시작하잖아요. 처음에는 상처 입은 손가락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햇빛도 쨍하게 받으면서 얼굴이 꽉 차게 그리고 싶었어요."
대관람차, 휠체어 바퀴, 비빔밥 그릇, 테이블…원형의 오브제
'세기말의 사랑'에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원형'이다. 대관람차, 휠체어의 바퀴, 영미의 미싱 등 곳곳에 원형의 무언가가 영미의 주변을 맴돈다. 이 역시 임 감독의 의도가 담긴 장면이다. 콘티를 만들 때부터 원형 이미지를 찾고, 클로즈업까지 계산했다.
임 감독은 "의미적인 면에서는 원은 어디가 짧고 긴 게 아니라 사방이 다 똑같은 길이고, 똑같은 방향성을 갖고 있다"며 "영미가 세상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모난 것 없이 잘 굴러가면 좋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색을 품고 원을 그리며 도는 원형의 대관람차는 "이 세상은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의 완성품처럼 보이고 싶었다. 영미와 대관람차를 카메라로 잡을 때도, 영미가 중앙에 있고 그 뒤로 대관람차가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편집됐지만, 오빠에게 돈을 받으러 간 영미가 반짝이는 미러볼 밑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다. 임 감독은 "유영씨가 그 장면 빠진 걸 너무 안타까워한다"며 "영미가 박영미의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을 부르는데, 시나리오 쓸 때 많이 들었던 노래다. 그 노래가 이 영화의 무드를 잡았다. 그걸 부르는 영미를 보며 내가 많이 울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영미의 미싱도 마찬가지예요. 불에 탄 미싱이 다시 돌아가고, 영미는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해요. 결국 재생하는 거예요. 또 영미와 유진이 비빔밥을 먹는 양푼도 동그랗죠. 유진의 밥을 따로 마련하고 먹여주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숟가락이 섞인 거예요. 그만큼 두 사람이 친해졌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엔딩에서 영미와 도영이 만나는 장면에서도 온통 원형의 오브제가 등장한다. 원형 테이블, 원형 인주, 커피잔, 꽃병, 재떨이 등 모든 게 다 원형이다. 영미를 향한 감독의 마음이다.
"영미야, 너도 이 세상에 섞여서 살 수 있고, 너도 평등한 위치에서 동등하게 살 수 있어. 그리고 너의 삶은 이렇게 계속 여러 모습으로 굴러갈 거야. 이런 다양한 의미로 볼 수 있어요. 이걸 감독이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관객분들이 그렇게 느껴주셔야 하는데…."(웃음)
임 감독은 다행히 자신이 넣은 여러 가지 장치와 의미를 알아보고 질문해 주는 관객이 많아서 기쁘다고 했다. 관객들의 상냥하고 다정한 시선이 '세기말의 사랑'이 가진 의미를 하나씩 발견하고, 품어가는 것이다. 임 감독의 올해 목표도 '상냥함'이다.
"상냥함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보석 같은 마음이라고 봐요. 제 올해 모토가 상냥함이에요. 제가 그렇게 쿨한 사람은 아니고 상냥한 편이긴 한데, 더 상냥해지는 게 모토입니다."(웃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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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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