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 논리 깬 미투…그들의 절박함을 법원이 알게 됐다

이지혜 기자 2024. 1. 3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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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저울 위, 미투 6년 (하)
한국여성연극협회가 세계여성의날인 2018년 3월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위드유’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2018년 1월29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인 ‘이프로스’에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검찰 내에서 벌어진 강제추행 피해 사실과 인사 불이익의 과정이 기록돼 있었다. 미투의 시작이었다. 수많은 여성이 유폐됐던 성폭력을 증언하고 또 연대했다. 그렇게 6년이 흐른 오늘, 한겨레는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 서지현을 만났다. 서지현의 7번의 재판과 그 이후 법정에 선 미투 사건들을 살피며, 법원의 변화와 한계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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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기까지였지만 이후에 올 여성들은, 다음 세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서지현은 안태근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지난해 12월21일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6년 전 서지현과 함께 수많은 여성은 애써 억누르고 삼켜온 성폭력 피해 경험을 폭로했다. 각계각층에서 터져 나온 ‘미투’는 성폭력이 구조적 차별 문제라는 점을 드러냈다. 서지현의 바람처럼 거대한 파도가 된 ‘미투 운동’은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웠고 성범죄와 2차 가해를 대하는 법원의 태도까지 크게 바꿔놨다.

법원은 오랫동안 ‘진정한 피해자라면 가해자와 평소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거나 ‘진정한 피해자라면 즉시 신고할 것이다’ 같은 근거 없는 인식으로 피해자의 증언을 묵살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법원은 그동안 고수한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타파했다. 대신 성범죄 피해자들의 개별 상황을 고려해 증언 신빙성을 판단하는 방향으로 역사적인 진전을 시작했다.

‘상상 속 피해자’를 넘어 실체적 진실로

‘미투 1호 판결’로 꼽히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은 법원의 태도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안 전 지사는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1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이후에도 가해자가 좋아하는 아침 식사를 찾으러 다닌 점, 주변 동료들과 평소와 같이 가해자를 지지하는 대화를 나눈 점 등이 피해자답지 않았다는 취지다.

하지만 2심에서 안 전 지사는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심은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1심 판단을 대부분 뒤집었다. 이어 “지금 미투 상황에서는 얘기할 수 있지만,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 2차 피해, 감내해야 하는 변화들(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피해자의 호소를 인용하기도 했다.

모델을 성추행해 징역 8개월을 확정받은 사진작가 ‘로타’(본명 최원석) 사건에서도 ‘피해자다움’이 쟁점이 됐다. 모델 지망생이었던 피해자는 미투 운동으로 용기를 내 유명 사진작가인 최씨에게 촬영 중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재판에서 최씨는 피해자가 2013년 일을 2018년에 뒤늦게 문제제기하고 있으며, 사건 이후 친근한 분위기에서 메시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며 피해자가 동의한 신체접촉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는 과거 여러 성범죄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주장하고 법원이 인정한 ‘무죄 정황’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피해 사실을 고발할 경우 사진계에서 나쁜 평판을 얻게 될 것이 두려워, 되도록 원만하게 가해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피해자의 절박한 상황이 엿보인다며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 1심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서 “최근 1년여는 미투 운동의 여파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존 행위가 추행은 아니었는지, 권력이나 힘에 의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던 격동의 시기였다”며 “그럼에도 피고인은 일체의 진지한 성찰이나 사과 없이, 미투 운동 분위기에 피해자가 편승했을 뿐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폭행·협박 없는 ‘권력형 성범죄’도 단죄

미투 운동은 폭행·협박 없이 위세와 권력만으로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권력형 성범죄의 구조를 폭로하면서 ‘위력’에 대한 논의도 불러일으켰다. 이전까지 법원은 주로 미성년자와 장애인에 대해서만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을 인정했다. 성인 피해자의 경우 관련 판례도 드물고 처벌도 솜방망이에 그쳤다.

안 전 지사 사건에서 1심은 ‘위력이 있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고 봤다. 하지만 2심은 “비서 업무 내용 및 강도와 피해자가 상시적으로 피고인의 심기를 살피는 것을 보면 지위, 권세 및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무형적 위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연극계의 왕’으로 군림하며 상습적으로 단원들을 성폭행해 징역 7년을 확정받은 연극연출가 이윤택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1심은 유사강간치상과 상습강제추행 혐의를 인정해 이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으나 위력에 의한 추행은 무죄로 봤다. 피해자가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휴일에만 극단 일을 돕던 상황이라 피고인의 보호·감독을 받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위력이 행사될 상황이 아니었다는 취지다.

하지만 2심은 “피해자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은 호텔 청소가 아니라 안무가 역할”이었고 “이씨 눈 밖에 나는 경우 피해자가 안무가로 계속 활동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봤다. 이씨의 위력을 인정한 것이다. 2심에서 이씨 형량은 징역 7년으로 늘었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성폭력만큼 고통스러운 ‘2차 가해’도 엄벌

성폭력 피해만큼이나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2차 가해’를 처벌하기 시작한 것도 ‘미투 운동’ 이후다. 과거 수사기관은 2차 가해를 단순 명예훼손 등으로 취급해 합의를 종용하거나 기소유예나 약식기소 처분을 내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미투 운동 이후 법원은 2차 가해 사건의 벌금액을 상향하는 등 엄벌 의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2020년 10월 법원은 김지은씨에 대한 비방 댓글을 올린 안 전 지사의 전 비서 어아무개씨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어씨가 벌금 100만원 약식기소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하자 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의 전형”이라며 더 무겁게 처벌했다. 2021년 2월에도 법원은 박재동 화백의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자에게 ‘거짓 미투를 했다’며 2차 가해를 한 더불어민주당 비서관 출신 ㄱ씨에 대해 약식명령에서 정한 벌금 70만원의 7배가 넘는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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