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명 심금 울린 '유방암 신약' 급여화 밀당, 언제까지?[약 읽어주는 안경진 기자]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2024. 1.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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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C 신약 '엔허투' 유방암 환자의 마지막 희망
작년 5월 건보 첫 관문 통과···8개월째 진척 없어
생존기간 늘수록 건보재정 부담 커지는 아이러니
ADC 항암제 '엔허투' 제품 사진. 사진 제공=한국다이이찌산쿄
[서울경제]

“제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유방암 환자들이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되길 빕니다. ”

작년 이 맘때 어머니가 전이성 유방암 4기로 진단됐다는 사연이 국회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청원인은 어머니가 다양한 항암제를 사용해 봐도 계속해서 내성이 생긴다며 유방암 환자에게 마지막 희망으로 불리는 항암제 ‘엔허투’의 건강보험 등재를 촉구했습니다. '엔허투'는 2022년 9월에 유방암과 위암 치료 용도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은 항체약물접합체(ADC·Antibody Drug Conjugate)입니다. 특정 단백질을 정밀하게 표적하는 ‘항체(Antibody)’에 강력한 세포사멸 기능을 갖는 ‘약물(Drug)’을 링커로 연결해 만드는 바이오의약품의 일종인데요. 암세포를 죽이는 효과가 뛰어난 데도 부작용이 암이 전신으로 퍼져 수술이 불가능한 유방암 환자들의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통상 항암제는 투여 순서가 늦어질수록 약효가 떨어지게 마련인데, '엔허투'의 경우 2차 치료를 시작해도 기존 치료제보다 암의 진행을 멈추는 기간이 4배 이상 길게 유지된다고 해요. 2022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현장에서 '엔허투'의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자 연구자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고 하니 대략 체감이 되시나요?

문제는 비용입니다. 작년 1월에 약이 정식으로 출시됐지만 청원인의 어머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방암 환자들에겐 ‘쓸 수 없는 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치료비 전액을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웬만한 가정에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거든요. 21일 주기로 투여받는 '엔허투' 1바이알(100mg)의 가격은 비급여 기준 230만 원 내외입니다. 환자의 체중에 따라 1회 투여용량이 달라지는데, 성인 환자는 통상 회당 3~4바이알을 투여받게 되죠. 단순 계산해도 3주치 약값만 750만~900만 원, 연단위로 환산하면 1억 2000만~1억 5000만 원에 달합니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다는 딸의 안타까운 사연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해당 청원은 사흘만에 5만 명의 동의를 얻었고, 이후에도 '엔허투'의 급여화를 촉구하는 청원이 5건 더 올라왔는데요. 이들 청원에 동의한 인원을 전부 합치면 15만 명에 달합니다.

곽점순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가운데)과 임원진이 지난 29일 '엔허투' 보험 급여를 촉구하는 6451명의 서명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서울지부에 전달했다. 사진 제공=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

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났지만 유방암 환자들의 사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불과 하루 전날에도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서울지부를 방문해 '엔허투' 보험 급여 촉구에 동참한 6451명의 서명서를 전달했죠. 급여화 논의의 첫 관문인 암질환심의위원회를 통과하면서 유방암 환자와 가족들의 기대감을 키웠던 게 작년 5월인데, 8개월이 지나도록 약제급여평가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한 겁니다. 지난 11일에 열린 올해 첫 약평위에서 '엔허투'의 급여 적정성을 심의한 심평원이 '재심의' 결론을 내리자 전국 3000여 명의 한유총회 회원들이 유방암 환자와 가족, 의료진들과 함께 서명운동을 진행한 지 약 20일 만에 이 같은 참여율을 달성했다고 해요.

'엔허투'의 투여 대상인 사람상피세포증식인자수용체 2형(HER2) 양성 유방암은 재발과 전이가 잦고 진행 속도가 빨라 유방암 중에서도 예후가 좋지 않은 편에 속합니다. 전체 유방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 정도라 적지도 않죠. 더욱 고약한 건 한국 여성은 미국, 유럽 등 서양에 비해 젊은 나이에 유방암이 발병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으로 사망하는 환자 10명 중 7명은 40~50대 여성으로 알려졌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가 효과 좋은 약이 있는 데도 비용 때문에 써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환자 개인과 가정의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인 셈이죠.

정부도 고민이 깊습니다. '엔허투' 투여 대상이 많다는 건 그만큼 건보 재정에 가해지는 부담이 크다는 의미인데, 효과가 좋아 기존 약보다 4배 이상 오래 산다고 하니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건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꼭 필요한 환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제약사와 소위 밀당(밀고 당기기)을 벌여야 하죠. '엔허투'의 급여 적정성이 인정되더라도 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의 약가협상, 보건복지부 건강정책심의위원회 등을 거쳐 급여 처방이 이뤄지려면 갈 길이 너무나도 멉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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