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PBR株 ‘문제아 리스트’ 만들겠다는 정부… 업계는 “1호 꼬리표” 우려
당국, 日처럼 PBR 1배 미만 기업 공시하기로
전문가들 “방향성 공감하지만, 국내 현실 참작해야… 효과 의문”
한국 증시가 미국·일본에 비해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자 금융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올해 주요 정책 과제로 꼽았다. 당국은 그 일환으로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종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비교 공시를 도입할 계획인데, 이를 두고 업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주가 부양책을 내놓아도 주가가 오르지 않으면 주가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투자자들로부터 ‘나쁜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달릴 것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첫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를 얻게 될까 봐 불안해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3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올해 상장사의 기업가치를 높이는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운용할 방침이다. 대표적으로 금융위원회는 한국거래소와 협의해 상장사 업종별 PBR 비교 공시를 시작할 계획이다. 세부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한국거래소는 PBR 1배 미만 기업을 투자자들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공시할 계획이다. 시가총액이 보유 자산보다 적은 PBR 1배 미만 기업이 스스로 주가 부양책을 내놓도록 유도한다는 취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코스피) 시장과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기업 중 PBR 1배 미만인 종목은 지난 26일 종가 기준 1104곳으로 집계됐다. 국내 증시 전체 종목의 절반이 넘는 57.68%에 해당한다. 코스피 PBR은 0.90배인데, 이는 미국 상장주 평균(4.6배)과 비교해 크게 뒤처지고, 일본 니케이255지수(1.4배)와 비교해도 낮은 수준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PBR이 낮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스스로 어떻게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을지’ 공시를 하게 유도함으로써 기업가치를 높이는 제도를 운용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는 일본의 증시 부양책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도쿄·오사카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일본거래소그룹(JPX)은 지난해 3300여 상장사에 공문을 보내 “PBR이 1배를 밑도는 경우,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체 방안을 공시하고 실행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와 함께 “주가가 청산 가치에도 못 미치는 PBR 1배 미만 상태가 계속되면 2026년 상장폐지 목록에 오를 수 있다”는 경고를 덧붙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기업들은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배당을 확대해 주가를 끌어올려 최근 도요타자동차 등 169개 사의 PBR이 1배를 넘어섰다. PBR 1배 미만 기업 비중도 과반이었던 51%에서 44%로 떨어졌다. 니케이225 지수는 JPX가 목소리를 높일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해 작년 한 해 동안 28.24% 상승했고, 올해도 8%를 넘는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국의 계획에 대해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 공시를 강화해 투자자 자금 유입 확대를 돕는 등 주가 부양에 도움이 될 수 있어 방향은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증시에서도 실제로 효과가 나타날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일본과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일본 증시가 호황을 맞이한 배경엔 PBR 개선책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도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 유지, 양호한 경제지표 등 다른 요인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고경범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일본은 일본 기업 특유의 높은 자산 유보율과 재무 건전성이 있어 개선책이 주효했던 것 같다”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국내 현실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 연구원은 “일본 증시에서는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 정책 발표로 인한 수급 효과도 있었지만, 일본은행(BOJ)과 기관 투자자의 수급 기여가 컸다”며 “자국 내 주식형 상장지수펀드(ETF)의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지수 랠리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경우 과거 역대 정부가 녹색 성장, 통일 펀드, KRX300, 뉴딜 지수 등 기금 조성 프로그램을 제시했지만 주식시장의 자금 형성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공시제도가 자칫하면 이른바 ‘부실기업’ 낙인을 찍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5곳 중 3곳이 PBR 1배가 안 되는데, 이들을 따로 묶어 비교 공시하면 투자자 입장에선 ‘나쁜 주식’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면서 “1배가 안 되는 기업이 너무 많아 기업 입장에서는 자포자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정책 방향엔 공감하지만, 자꾸 규제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부담감이 생기는 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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