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규제 12년...무엇을 잃고, 얻었나(1화) [이환주의 생생유통]
지금부터 딱 30년전 부모님은 경기도 부천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전통시장이나 가두에 있는 소규모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겨울 대표 과일 귤은 1000원에 10개, 20개도 팔던 시절이었다.
당시 학교를 마치고 초등학생이던 기자도 가게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손님이 2000원어치 귤을 사면 1개를 더 서비스로 넣어 주면서 "1개 더 넣어 드렸어요"라고 말했다. 10살 남짓이었지만 부모님 어깨 너머로 장사의 비결이란 '서비스로 귤 1개를 더 넣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손님에게 알리며 생색을 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소매 판매 외에도 당시 '초원청과(과일 가게 이름)'는 인근 유흥주점과 호프집에 과일 배달도 많이 했다. 아버지는 전화로 주문을 받고, 먹지가 있는 영수증에 외상 내역을 적고,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 저곳 배달을 다녔다. 당연히 별도 배달비는 없었다.
부모님이 초원청과를 시작하고 5년 정도 지나 부천 역사 안에 '이마트'가 생겼다. 부천역 북부에는 '로얄백화점'이 부천역 남부에는 '자유시장'이라고 하는 전통시장이 함께 공존했다. 초원청과, 전통시장, 대형마트의 공존은 이후로도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마트의 등장 후 몇 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옷과 책을 주문하는 일이 늘었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빵집들도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꿔 달았다. 동네 빵집의 대명사였던 크라운베이커리도 2013년 완전히 문을 닫았다.
현재 우리나라 빵집은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와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가 주도하고 있다. 전국 어디서나 높은 품질의 빵을 즐길 수 있고, 한국의 빵이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도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나라의 빵 가격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단순히 임대료와 인건비의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 빵을 먹은 외국인들은 "맛있다"면서도 "비싸다"고 입을 모은다.
1990년 중반 시작한 부모님의 초원청과는 2010년 후반 쯤에 문을 닫는다. 문을 닫기 전 2~3년 동안은 적자를 봤다.하지만 초원청과의 폐업이 대형마트의 등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2000년 이전까지의 소비자들은 흠집이 난 사과를 저렴하게 떨이로 초원청과에서 사갔지만 이후에는 대형마트의 깔끔한 사과를 더 선호했다. 소득이 늘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는 선택권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연탄 가게가 문을 닫고, 필름 카메라 회사가 망하는 것이 기름 보일러 회사와 디지털 카메라 회사의 탓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국회는 지난 2012년 대형마트의 야간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매월 주말 2회 강제 휴무를 하도록 한 '유통산업 발전법(유통법)'을 제정했다.
당시 대형마트 근로자들은 휴식 시간이 없어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야간에 쉴 공간도 없어 노동자로서의 인권이 지켜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또 빠르게 증가하는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이 출점을 늘려 나가며 골목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국내 대형 유통기업들은 이 시기에 백화점, 교외형 아웃렛, 대형마트 등의 매장을 늘려나가며 몸집을 키웠다.
유통법 시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은 '을지로위원회'를 조직했다. 을지로위원회는 2013년 5월 남양유업의 대리점 갑질사태를 계기로 탄생했다. 세상의 '을'들을 위해 활동하고 연구하는 집단으로 유통법의 시행과 유지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취지도 좋았다.
2014년 말부터 필자는 파이낸셜뉴스 생활경제부에 소속돼 취재를 시작했다. 매년 명절이면 대형마트, 전통 시장을 방문해 설 민심을 살피고 시행 몇 년이 지난 유통법의 효과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통시장 상인들은 한 목소리로 "대형마트가 문을 닫으니 그나마 살 것 같다"며 "대형마트가 문을 닫아서 매출이 늘었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기자의 물음에 구체적으로 수치(20% 늘어난 것 같다는 등)를 주기도 했지만 근거가 있지는 않았다. 다만 기자 역시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들이 또 다른 '초원청과'의 사장님처럼 보였고 그들의 목소리를 더 유심히 들었다.
현장에서 직접 만나본 대형마트 본사의 직원들은 "주말에 문을 닫게 되면서 주말에 일하던 직원들이 해당 시간에 근무를 할 수 없게 됐다"며 "일부 대형마트 근로자들은 오히려 추가 수당이 나오는 야간, 주말 근무를 선호하기도 했는데 법 때문에 원천적으로 막혀버렸다"고 토로했다.
주변 지인들 중에서도 "평일에 시간이 없어 주말을 이용해 대형마트에 차를 몰고 갔는데 대형마트가 문을 닫아 헛걸음을 했다"며 불편을 토로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전국의 초원청과 사장님들, '을'들을 위해 선의로 제정된 '유통산업 발전법'의 취지 자체는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형마트 영업규제의 실효성을 문제 삼는 여러 연구들이 나왔다. 해당 연구들은 대부분 대형마트가 회원사로 가입된 협회나 대기업 등이 소속된 연구기관을 통해서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당 연구들이 편향됐다고만도 볼 수 없었다.
한국유통학회(2017년, 2019년), 한국중소기업학회(2018년)는 총 3차례에 걸쳐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의 실효성을 분석했다. 신용카드 빅데이터를 활용한 전수조사 방식으로 그 결과 대형마트 의무 규제 효과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마트가 문을 닫을 경우 주변 소매 점포 소비금액은 8~15% 감소했다. 반면 의무휴업일에 온라인 쇼핑 이용금액이 최고 37% 증가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으로 주변 상권이 이득을 본 게 아니라 온라인 쇼핑으로 수요가 몰린 것이다.
2017년 연구에서는 대형마트가 출점할 경우 전통시장은 100명의 고객 중 4.91명의 고객을 뺏기지만, 오히려 14.56명의 고객이 신규 유입돼 모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대형마트 1곳이 폐점할 경우 반경 3㎞이내 주변상권에서 총 429명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마트가 일자리 유지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형마트 규제를 시작한 2012년과 10년 뒤인 2021년 대형마트와 전문소매점(전통시장 및 골목상권 등) 매출 점유율은 각각 23.9%와 32.6% 감소했다. 반면 이 기간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무점포소매의 시장 점유율은 129.7%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법은 대형마트를 규제해 죽어가는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의도였지만 규제로 인한 소상공인의 반사 이익은 크지 않았다는 점이 숫자로 증명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해 4월 한국유통학회, 한국소비자학회, 한국프랜차이즈학회, 한국로지스틱스학회의 유통물류 관련 4개 학회 전문가 108명을 대상으로 '유통규제 10년, 전문가의견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문가 10명 중 7명(70.4%)은 대형마트에 대한 규제가 대형마트는 물론 보호대상인 전통시장까지도 패자로 내몰았다고 답했다. 83.3%의 전문가는 "대형마트 규제 폐지 또는 완화가 바람직"하다고 응답했다. 76.9%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규제로 인한 전통시장 활성화 효과가 없다"고 답했다.
정연승 단국대 교수는 이미 2020년에 "유통시장은 '대형마트' VS '전통시장'이 아닌 '온라인 시장 VS 오프라인 시장'의 경쟁으로 유통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대형마트 #영업규제 #휴무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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