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편일률 항일 대신 젊은이의 꿈·가족애… 무대는 지금 ‘모던 경성’
“합시다, 오페라! 조선 최초의 오페라!”
연극 공연까지 금지된 일제강점기 경성, 연극 단체인 ‘문학회’ 회원 대학생들이 뜻밖의 오페라 공연에 뛰어든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일 테노레(Il Tenore·‘테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는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공부한 뒤 1948년 한국 최초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한 테너 이인선(1907∼1960)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 초연 작품. “단연코 올겨울 한국 뮤지컬의 최고 화제작”(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뮤지컬 무대가 ‘모던 경성’과 사랑에 빠졌다. ‘제시의 일기’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딜쿠샤’ 등 많은 창작 뮤지컬의 시대 배경이 일제강점기. 이들은 폭압적 일제에 맞서는 과거의 천편일률 항일 메시지를 앞세우기보다, 시대상을 서사적 장치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신문물에 대한 동경, 시대와 불화하는 젊음, 그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로 풀어가는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왜 경성일까.
◇①시대와 불화하는 젊음의 고난
뮤지컬 ‘일 테노레’에서 세브란스 의전 학생 ‘윤이선’(홍광호·박은태·서경수)은 여학생 ‘서진연’(김지현·박지연·홍지희)을 만나러 갔다가 서양 선교사가 진행하던 이화여전 합창 수업에 끌려 ‘오페라’를 알게 된다. “오페라, 그게 뭐냐면…. 이태리 창극입니다!”
처음엔 발성도 어려워하던 윤이선이 성악에 눈을 뜨고 오페라에 매혹돼 가는 과정은 이 뮤지컬 전반부의 매력 포인트. 연극으로 항일 메시지를 전하려던 젊은이들도 중세 유럽 배경 이야기로도 충분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오페라 공연으로 방향을 튼다. 침략자들에게 맞서는 베네치아 사람들이 주인공인 극중 오페라 ‘꿈꾸는 자들’은 이들에게 일제의 검열을 피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소리 높여 외치는 수단이다. 수많은 수상·흥행 기록을 가진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함께 만든 콤비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의 작품. 새로 창작한 음악인데도 불가항력적으로 아름다운 오페라 넘버들로 이 엄혹한 시기의 무모한 도전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극중 오페라는 젊은이들 특유의 기발한 ‘꼼수’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외교관이나 의사 같은 자신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년들 모습을 전면에 부각하는 영리한 서사적 장치가 된다. 궁극적으로 이야기는 젊은 시절 평생을 바쳐 이루고 싶었던 꿈에 관한 이야기로 승화한다. 거대 서사가 사라진 현대와 달리,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은 시대와 불화하는 젊음의 고난이라는 서사 틀을 제공한다.
◇②세련된 미학적 시도의 배경
이 시대가 배경이라면 ‘이화여전’ ‘세브란스의전’ 같은 옛 학교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 배우들이 영미 근대 드라마에서 보던 드레스와 신사복을 입고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무대에서 일제강점기는 현재보다 오히려 더 세련된 미학적 시도가 가능한 매력적 시대 배경이 된다. 최근 정동극장에서 공연한 창작 뮤지컬 ‘딜쿠샤’는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서울 종로구 빨간 벽돌집 딜쿠샤(페르시아어로 ‘행복’) 이야기. 3·1운동을 처음 세계에 알린 미국 출신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그의 아내가 살았던 아름다운 벽돌집 자체가 극의 전체적 분위기를 결정한다. 올해 한국뮤지컬어워즈 3관왕을 차지한 뮤지컬 ‘라흐 헤스트’에서도 작가 이상(李箱·1910~1937)이 지금의 명동에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의 색유리창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는 장면이 등장한다. 실제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등장하는 미쓰코시 백화점 에피소드는 ‘모던 경성’의 세련미가 무대 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소비되는 한 사례다.
◇③그때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 이상 악인과 배신자에게 대비되는 희생적 영웅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최근 일제강점기 배경 뮤지컬의 특징. 지난해 10월까지 두 달여 공연한 창작 뮤지컬 ‘제시의 일기’가 대표적이다. 실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였던 양우조(1896~1964), 최선화(1911~2003) 부부가 중국에서 맏딸 ‘제시’를 낳고 8년간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했다. 부부는 조선과 일본을 벗어나 바다 건너 더 넓은 세상에서 뜻을 펼치길 바라며 딸에게 서양에서도 쓸 수 있는 ‘제시’라는 이름을 준다. 뮤지컬은 중일전쟁 와중에 임시정부의 피란길을 뒤쫓아 가야 하는 가족의 고난을 비춘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증오나 적개심보다는 하루하루 아이를 키워가는 엄마 아빠의 애환에 가깝다. 관객들은 “그때도 아이 키우기는 보통 일이 아니었네” 같은 리뷰를 쓰며 이 뮤지컬에 공감했다.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400석 미만)을 받은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역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일제 경찰에 쫓겨 저택에 숨어든 청년과 저택에 사는 귀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건 그 시대 보통 사람들의 이루지 못한 꿈 이야기다. 해묵은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젊은 창작자들이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관습적 서사 틀을 깨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창작해낸 사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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