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외국’으로 규정한 김정은 구상의 허상[동아시론/전재성]
北, 한국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군사 위협하며
美와 관계 정상화-제재 완화 상정하는 건 무리
북한의 변화가 치밀하고 일관된 전략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년부터 한국을 대한민국이라 지칭하고 2021년 노동당 규약에서 조국통일투쟁이라는 용어를 삭제하는 등 부분적 움직임은 있었지만 헌법적 차원에서 북한이 영토, 국민, 정부의 규정을 완전히 새롭게 한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북한의 논리를 따르면 남북 관계는 국제 관계가 되고, 한국은 외국 영토이며 한국민은 외국인이 된다. 대남기구를 철폐하고 외무성이 대남 관계를 주관할 것이며 남북 경제 교류는 국제무역 관계, 그리고 군사 충돌은 영토 분쟁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통일과 민족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고 있던 북한의 정신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미제의 식민지”인 한국을 해방시킬 의무도 사라지고 한국에 주둔하는 주한미군 역시 외국 간의 동맹일 뿐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러한 전략 변화는 북한에 몇 가지 이점을 줄 것이다. 남북을 단절시켜 한국 문화가 북한에 유입되어 독재를 위협하는 환경을 차단할 수 있고, 외국이 된 한국에 대한 핵공격의 전략적 부담을 덜어줄 것이며, 흡수통일의 두려움을 완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이 바라는 신냉전의 환경 속에서 북-중-러 및 “반미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연대에 올인하는 전략적 선명성을 과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국제 관계가 된다는 것은 훨씬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현대 국제 관계에서 두 주권국가는 상대방을 병합하거나 정복하지 못한다. 국제법상 엄연히 불법이기 때문이다. 설사 상대방이 먼저 공격하였더라도 완전한 병합은 용납될 수 없다. 교전 중이라도 타국은 존립이 보장되는 “정당한 적(just enemy)”으로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전쟁 시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여 소위 ‘영토 완정’을 실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서로 충돌한다.
더 나아가 향후 남북 경협이나 민족 간 특수 관계에 기반한 경제 교류 및 이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뜻이다. 북한이 향후 한국과 단절한 채 경제적 번영을 추구할 수 있을까? 한국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삼은 상태에서 북-미 타협과 미국의 대북 경제 지원 등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가? 한국을 적대적인 외국으로 군사적으로 위협하면서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고 제재 완화나 경제적 관계를 새롭게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는가? 올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계기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한국을 완전히 배제하고 북-미 관계가 수립된다고 믿을 수 있는가?
북한은 작년까지 북-중-러 및 반미 진영과 연대하여 핵무기 국가로서 지위를 확보하고 경제발전을 도모할 것인가, 혹은 핵능력을 제고하여 한국 및 미국과 새로운 협상에 대비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올해의 전략 변화로 새로운 결단을 내렸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한미와 단절하고 북-중-러 연대에 온전히 희망을 걸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유엔의 대북 경제 제재의 틀을 벗어나는 데 외교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고, 미국을 핵공격할 수 있는 기술을 북한에 넘겨주기 쉽지 않다. 지구적 리더십을 추구하는 중국 역시 북한의 핵국가 승인은 어렵고, 미중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도 북핵 문제는 협력 사안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올 한 해 북한은 외국이 된 한국에 대해 지속적 도발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하며, 핵무기 국가 지위를 인정받고, 북한 문제의 우선순위를 높이며, 미국 대선 이후 새로운 협상의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다. 동시에 군수산업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중-러와 군사, 경제 관계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복잡한 지정학 환경과 새로운 남북 관계 속에서 한국은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한반도가 신냉전 구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고,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며 한미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비핵화와 통일로 가는 강건한 중심을 잡아야 할 때이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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