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갤러리가 찾은 ‘숨은 보석’ 한국 작가들···소수자 서사부터 재난 이후까지

이영경 기자 2024. 1. 2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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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대형 갤러리 리만머핀·타데우스 로팍
신년 첫 전시로 한국 작가 그룹전
리만머핀에서 열리고 있는 ‘원더랜드’ 전에서 켄건민의 ‘1992, Western Ave.’가 전시돼 있다. 리만머핀 제공.
자수와 공예로 소수자 이야기 강렬하게
리만머핀 ‘원더랜드’

작열하는 태양의 화려한 빛 아래 원색의 자연 풍광이 강렬하게 펼쳐진다. 그 아래 호랑이가 내장을 드러낸 채 죽어 있다. 춤추는 듯 이글거리는 배경에 대비해 호랑이의 사체는 가련해 보인다. 취약한 부분을 남김없이 드러낸 호랑이의 벌어진 상처는 반짝이는 비즈와 자수로 정성스레 채워넣었다.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에서 열리고 있는 ‘원더랜드’에 전시된 켄건민 작가의 작품 ‘2022-1988’이다.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1988년 서울과 2022년 로스앤젤레스(LA)의 기억을 엮은 작품이다.

P-22는 미국 LA 인근에 서식하던 야생 표범으로 2022년 안락사됐다. 할리우드 인근을 어슬렁거리는 표범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P-22가 주택가에 출몰하게 된 것은 개발 탓이다. P-22는 도시와 고속도로로 둘러싸인 공원에 고립돼 살았다. “P-22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동물들의 삶과 서식지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 기억 속 서울과 호랑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죠.” 지난달 14일 리만머핀에서 만난 켄건민이 말했다.

켄건민, 2022-1988(2023_ oil, Korean pigment, silk embroidery thread, beads, crystals 203.2 x 162.6 cm. 리만머핀 제공

1988년 켄건민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초등학생을 동원한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올림픽을 위해 수업에 빠지고 강제로 연습에 동원됐어요. 연습하다 일부 쓰러지는 학생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트라우마가 된 경험이었죠.” 갈라진 배를 드러낸 호랑이의 상처는 불편하지만 우리가 응시해야 할 상처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는 반짝이는 보석과 자수 등으로 상처를 아름답게 메워넣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한 위로와 헌사처럼 보인다.

켄건민의 또 다른 작품 ‘1992, Western Ave.’는 한층 더 강렬하다. 지상낙원 같은 아름다운 땅 위와 대비되는 수면 아래에서는 ‘해양생물 잔혹극’이 벌어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번졌던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범죄와 1992년 ‘LA 폭동’을 떠올리며 그렸다. 서양 재단화 형식을 차용해 수면 위와 아래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켄건민은 “제 자신이 이민자로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색인종이다 보니 자연스레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켄건민의 작품은 동서양적 요소가 혼종돼 다채로우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뿜는다. 동양자수를 연상시키는 자수와 비즈공예를 사용한 것이 눈길을 끈다. 켄건민은 “자수나 공예가 전통적으로 여성의 돌봄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주류 미술에서 소외돼왔다. 그런 측면이 소수자들의 서사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 대형 갤러리들이 한국 작가들의 그룹전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2017년 한국에 진출한 리만머핀이 한국·한국계 작가들의 그룹전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엄태근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켄건민, 유귀미, 유미애, 현남 작가의 회화와 조각을 선보인다. 현남 작가를 제외하면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들로, 해외 이주 등 디아스포라적 배경을 지닌 작가들이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뉴욕에서 1996년 처음 문을 연 리만머핀은 홍콩, 서울, 런던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전시는 다음달 24일까지. 무료

미술 시장에 안 알려진 ‘비엔날레 작가’들 작품 전시
타데우스 로팍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 전시 전경. 타데우스 로팍 제공

서울 용산구 타데우스 로팍 역시 새해 첫 전시로 한국 작가들의 그룹전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를 준비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이었던 김성우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제시 천, 이해민선, 정유진, 남화연, 권용주, 양유연 6인의 작품을 전시한다. 참여 작가들은 비엔날레와 미술관 전시 등을 통해 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미술시장에서는 생소한 편이다. 대형 상업 갤러리로서는 ‘파격적 선택’을 한 셈이다.

김성우 큐레이터는 “외국은 비엔날레 참여 등을 기준으로 미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반해 한국은 유난히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상업적 작가들이 나타나는 등 미술계와 시장의 거리가 있다”며 “시장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술 고유의 가치로 좋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들을 꼽았다. 한국의 상업적 미술과 비상업적 미술의 분리를 불식시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해민선, 고요한 삶_침전물, 2023, 인화지 위에 아크릴릭, 115.3 x 93.3 cm (45.39 x 36.73 in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대표 작가로 참여하기도 한 남화연의 신작 영상 ‘과도한 열정’은 인간의 탐욕과 소비문화를 강렬한 이미지로 전달한다. 탐스러운 과일을 집어먹는 손과 얼굴 근육의 움직임과 음식물 처리장의 처리 과정을 대비시켜 현대문명의 낭비적 소비 이면에 가려진 소화·처리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시장 1층과 2층 한가운데를 차지한 1995년생 작가 정유진의 조각 역시 눈길을 끈다. 코로나19 등 재난적 상황을 경험한 작가는 재앙 이후 회복과 재건의 움직임을 포클레인, 덤프트럭, 불도저 등 중장비의 모습을 통해 표현했다. 플라스틱 끈, 종이 등 중장비와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이용해 형상화한 작품들은 어딘가 어설퍼 보이지만 중장비의 움직임 특징을 잘 포착해 위태로운 현실과 회복의 움직임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한다.

타데우스 로팍은 1983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첫 갤러리를 설립했으며 2021년 한국에 진출했다. 잘츠부르크, 파리, 런던 등 5개 지점을 두고 있다. 전시는 3월9일까지. 무료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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