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이언 벅 엔비디아 가속 컴퓨팅 부문 총괄 겸 부사장 | “엔비디아, 전 세계 유일하게 모든 기업과 협력하는 AI 플랫폼 회사”
컴퓨터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이제는 가정마다 1대 이상 보급돼 있는 PC뿐만 아니라 데이터센터, 에지(edge·말단 기기)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컴퓨팅 디바이스는 1970년대 인텔이 개발한 ‘X86’이라는 이름의 명령어 집합을 반도체로 구현한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이 X86 구조는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의 대중화를 주도했으며, 반세기가 지난 현시점에서도 모든 컴퓨팅 시스템의 기반이 됐다.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든 것은 2012년 딥러닝 열풍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시가총액 1조달러(약 1317조원)라는 기념비적 사건을 만들어낸 엔비디아다. 일반적으로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설계 기업으로 알려져, 엔비디아가 몰고 온 광풍이 단순히 GPU 성능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50년 전에 개발된 컴퓨팅 구조에 의존하고 있는 정보기술(IT) 산업 전반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측면에서 엔비디아의 도약은 더 큰 함의가 있다.
생성 AI(Generative AI)가 화두로 떠오른 지금 컴퓨터의 보급과 대중화를 주도한 X86 기반 아키텍처(architecture·컴퓨터 시스템 전체의 설계 방식)는 폭주하는 데이터 트래픽과 인공지능(AI)을 담아내기엔 너무 오래되고 낡은 틀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딥러닝의 창시자인 제프리 힌턴 교수가 AI 솔루션을 개발하며 중앙처리장치(CPU) 대신 엔비디아 GPU를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막대한 데이터를 동시다발적으로 병렬 연산하는 기능이 필수인 AI 시대에는 새로운 컴퓨팅 언어와 이를 아키텍처로 구현한 하드웨어 플랫폼이 필요했다.
엔비디아에서 AI 및 HPC 컴퓨팅 사업을 총괄하는 이언 벅 부사장은 최근 미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본사에서 기자와 만나 “X86으로는 불가능한 AI 솔루션을 개발하기 위해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으며, 엔비디아는 이를 내다보고 지난 20여 년간 새로운 컴퓨팅 명령어 체계를 구상해 왔고 그 결과물이 바로 ‘쿠다(CUDA)’”라고 했다. 그는 “쿠다는 X86보다 더 다양한 라이브러리와 호환된다는 강점이 있다”며 “엔비디아가 추구하는 방향도 모든 기업과 협력할 수 있는 ‘AI 플랫폼 기업’이다”라고 말했다.
벅 부사장은 2004년부터 엔비디아에서 전 세계 GPU 컴퓨팅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소프트웨어 쿠다를 개발하고, AI 기본 틀을 공고하게 쌓아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벅 부사장은 “AI는 앞으로 모든 기업의 경영 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인 도구가 될 것이며, 이는 소비자 시장에서도 빠르게 확산할 것”이라며 “시장의 참여자가 늘어나는 건 가장 개방적인 AI 플랫폼 기업을 지향하는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회사 고정관념 벗어던진 엔비디아
엔비디아와 다른 반도체 회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개방성에서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반도체 회사의 칩 설계, 제조 프로세스는 업체 간 치열한 기술 경쟁에 따라 ‘비밀주의’ 성향이 짙었고, 폐쇄적인 협업 문화가 자리 잡았다. 실제 삼성전자나 인텔 같은 종합반도체기업(IDM)은 대외적인 파트너십에 소극적일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소프트웨어, 설계, 제조 등 분야에 따라 철저한 구획화를 추구해 왔다. 반면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 개발 단계부터 모든 부문을 파트너사와 협업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택했다. 벅 부사장은 이를 두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했다.
엔비디아가 20여 년간 반도체 설계만큼이나 공을 들여온 부분은 바로 개발자 친화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벅 부사장은 “개발자에게 친숙하고 접근하기 쉬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 GPU 기반 AI 생태계 확대의 첫 단추였다”고 말했다.
가장 큰 난관은 PC, 서버 등 전통적인 컴퓨팅 영역에 인텔 X86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 라이브러리(파일 집합)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벅 부사장은 “우리는 개발자 인터페이스를 확장해 선형 대수 라이브러리, 신호 처리 라이브러리, 이미지 처리 라이브러리, AI 라이브러리 등 수백 가지 라이브러리를 제공했다”며 “이 작업 또한 20여 년에 걸쳐 구축된 것이며, 이 과정에서 다른 기업은 물론이고 대학, 연구소 등과 다양한 파트너십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모든 AI 기업·개발자와 협력하는 유일한 회사”
엔비디아는 반도체 설계 전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자 커뮤니티와 긴밀한 소통을 거치기 때문에 새로운 GPU를 내놓을 때마다 개발자들은 더 빠르게 새 솔루션을 활용할 수 있다. 벅 부사장은 “20년 넘게 엔비디아가 쌓아온 소프트웨어 스택은 방대하다”며 “프로그래밍 도구와 전 세계 여러 소프트웨어 회사 모두 엔비디아가 구성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GPU가 나오는 즉시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각지에 있는 소비자의 수요와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해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엔비디아가 갖춘 개발자 중심 생태계의 강점이다. 벅 부사장은 “엔비디아는 한국의 KT, 네이버 등을 포함한 전 세계 통신 기업, 인터넷 기업과 협력해 대규모 언어 모델이나 AI 애플리케이션을 최적화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반도체 기업이 클라우드 기업이나 소셜미디어(SNS) 회사, AI 콘텐츠 회사 등과 직접적으로 파트너십을 맺고 연구개발 과정을 공유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엔비디아가 AI 분야 반도체 기업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벅 부사장은 “엔비디아는 전통적인 반도체 회사와 추구하는 모델이 다르다”며 “전 세계 모든 AI 회사와 협력하는 유일한 회사로서, 수많은 피드백을 반영해 모든 회사가 더 빠르게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무어의 법칙’ 뛰어넘는 엔비디아 기술 기반
벅 부사장은 엔비디아가 하드웨어 호환성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유지해 ‘무어의 법칙’ 이상의 성능을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의 회로 집적도를 높여 성능을 향상하는 ‘무어의 법칙’은 이제 끝났다”며 “무어의 법칙은 미세 공정의 진화에 따른 하드웨어적 성능 향상만을 강조하지만, 엔비디아는 모든 소프트웨어 계층에서 혁신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근 업계에선 반도체 미세 공정 전환 속도가 둔화하면서 생성 AI 같은 소프트웨어 혁신의 속도를 하드웨어가 따라가지 못하는 병목현상이 화두다. 이를 두고 벅 부사장은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개발 과정을 동일 선상에 놓고 진행하기 때문에 이 같은 병목현상이 구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벅 부사장은 인터뷰 중 여러 차례 엔비디아가 모든 기업과 협력하는 유일한 AI 회사라고 강조했다. 그는 엔비디아의 이런 ‘운 좋은 위치’ 덕에 앞으로도 빠른 혁신이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벅 부사장은 “엔비디아는 다른 기업들을 위해 AI 제품과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및 인프라를 구축하는 동시에 자체적으로도 AI를 개발하고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기업이 엔비디아 GPU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모델을 훈련하고 배포하는 데 함께 협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로써 피드백 루프(loop)가 만들어지고, 이 피드백은 즉각 방대한 양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반영된다”며 “고객은 다음 업데이트에서 3~10배 향상된 성능과 동시에 비용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벅 부사장은 “엔비디아의 새로운 GPU 출시 기간이 3년에서 2년으로 짧아졌고, 매년 새로운 기술을 내놓고 있다”며 “많은 고객이 GPU, 인프라, 데이터센터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만큼 엔비디아의 혁신은 앞으로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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