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북유럽인 큰 키와 만성 신경 질환은 유목민의 유산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에디터 2024. 1. 2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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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 크로피우니츠키 근처 마을에서 발굴된 5000년 전 얌나야인의 유골. 유목민인 얌나야인이 이 시기 서쪽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오늘날 북유럽인에게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기 쉬운 변이 유전자를 물려줬다. 사진 독일 마인츠대 2 세 차례 대규모 유럽 이주가 질병 관련 유전적 변이를 물려줬음을 보여주는 이미지. 항아리에 그려진 그림은 밑에서부터 수렵 채집인, 농경민, 유목민의 이주를 보여준다. 사진 Sayo Studio 3 1947년 덴마크 포모세(Pormose)에서 화살이 박힌 채 발굴된 신석기인의 두개골. 덴마크는 신석기시대 이래 10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두 번의 대규모 이주를 겪고 인구구성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진 덴마크 국립박물관 4 호주 커틴대의 모텐 알렌토프트 교수가 고대 유럽인의 유골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영국 옥스퍼드대 5 다발성 경화증은 인체의 면역 세포가 외부 침입자 대신 전선 피복처럼 척수나 신경세포를 감싼 보호막인 미엘린(노란색)을 공격하면서 발생한다. 사진 미 퍼듀대

북유럽인은 동쪽에서 이주해 온 유목민이 물려준 유전자 덕분에 남유럽인보다 키가 큰 것으로 밝혀졌다. 좋은 유전자만 준 것이 아니다. 유목민은 북유럽인에게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 유전자도 전했다.

과학자들이 지난 1만5000년 동안 발생한 인구 대이동을 통해 유럽인의 유전자를 구성한 역사를 재구성했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유럽인의 유전정보를 해독해 특정 질병에 잘 걸리는 경향이나 신체 특성이 언제 어디서 유래했는지 밝혔다.

덴마크 코펜하겐대의 에스케 윌레슬레브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은 1월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네 편의 논문에서 “고대 유럽인 1600여 명의 유전자분석 정보를 오늘날 유럽인 41만 명의 유전정보와 비교해 1만5000년 동안 인류의 이주 과정과 유전자 유산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농경 전해지면서 유럽인 유전자 동서로 갈려

연구진은 중석기와 신석기인 317명의 유골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해독했다. 대부분 지금으로부터 3000~1만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것이었다. 덴마크 룬드벡 재단이 제공한 고대인 1300여 명의 유전자 정보도 분석했다. 이렇게 확보한 고대인 1600여 명의 유전정보를 영국 바이오뱅크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오늘날 유럽계 백인 41만 명의 유전정보와 비교했다.

연구진은 고대인의 유전자와 나이, 매장 위치를 비교해 인구가 집단 이동하면서 특정 지역의 유전적 특성이 어떻게 변했는지 밝혀낼 수 있었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오늘날 유럽인의 유전적 다양성은 과거 유럽에서 있었던 세 차례 대규모 이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먼저 수렵 채집인들이 4만5000년 전 유럽에 정착했다. 이어 1만1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농경민이 중동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5000년 전 오늘날 러시아 남부의 볼가강과 돈강을 아우르는 폰틱(Pontic) 대초원에서 유목민들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유럽의 인구가 수렵 채집인에서 농경민으로 바뀌는 과정은 북유럽 발트해에서 남동유럽과 서아시아 사이 흑해까지 이어지는 게놈(유전체) 경계선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도입되면서 경계선 서쪽에서는 대규모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다. 반면 경계선의 동쪽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연구진은 중동에서 하던 농업이 동쪽의 기후에 맞지 않아 수렵 채집 경제가 서쪽보다 3000년은 더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목민 이주하면서 질병 유전자 전달

연구진은 유럽에서 지역에 따라 특정 질병의 발생 빈도가 다른 것은 과거 인류 이주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예가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다.

다발성 경화증은 인체의 면역 세포가 외부 침입자 대신 척수나 신경세포를 감싼 보호막인 미엘린을 공격하면서 발생한다. 미엘린이 파괴되면 신경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온몸이 굳어버리고 시력마저 손상된다.

특이하게도 북유럽의 다발성 경화증 환자가 남유럽보다 두 배나 많다. 연구진은 다발성 경화증 위험을 높이는 유전자가 폰틱 대초원에 살던 유목민인 얌나야(Yamnaya) 집단에서 발생했으며 나중에 북유럽으로 퍼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유전자분석 결과 다발성 경화증 유전자가 북유럽에 나타난 시기는 5000년 전 유목민의 이주와 일치했다.

흥미롭게도 얌나야인이 가진 다발성 경화증 유전자는 대초원에서는 오히려 도움을 줬다. 당시 인구가 늘면서 가축 전염병들이 창궐했다. 연구진은 다발성 경화증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는 양이나 소를 통해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얌나야인에게 면역력을 제공했다고 추정했다. 논문 공동 교신 저자인 라스 푸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다발성 경화증이 선사시대의 특정 환경에 대한 유전적 적응의 결과임을 알게 됨으로써 이 질환을 치료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에는 다발성 경화증처럼 지역별로 환자 수가 크게 차이 나는 병이 여럿 있다. 오늘날 남유럽인은 조울증에 걸리기 쉬운 유전적 특징이 있다. 이번 연구진은 남유럽인은 서쪽에서 온 농경민들로부터 조울증 위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설명했다. 동유럽인은 유전적으로 알츠하이머와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더 크다. 이는 처음 유럽에 이주한 수렵 채집인의 유산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외형적 차이도 이주민에서 유래했다. 북유럽인이 남유럽인보다 키가 큰 것은 동쪽에서 온 유목민이 물려준 유전적 특징이다.

전 세계 연구자 175명 공동 연구

유럽으로 이주한 집단들은 기존 인구를 완전히 대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덴마크는 1000년 이내에 두 번의 대규모 이주를 겪고 인구구성이 완전히 바뀌었다. 윌레슬레브 코펜하겐대 교수는 고고학적 증거나 유전자 변화 속도를 볼 때 이주민들이 현지인과 함께 공존하는 대신 모두 죽이는 쪽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약 5900년 전 신석기시대가 시작될 무렵, 오늘날 튀르키예인 아나톨리아에 유전적 뿌리를 둔 농민 집단이 덴마크에 이주했다. 이들은 덴마크에 살던 수렵 채집인을 완전히 대체했다. 그 뒤 5000년 전에는 동쪽의 유목민인 얌나야인이 도착해 아나톨리아 농민들을 제거했다. 얌나야인은 오늘날 덴마크 민족의 직계 조상이다.

이번 연구에는 덴마크와 영국, 미국, 호주에서 175명의 연구자가 참여했다. 공동 연구진은 “이번 결과는 다발성 경화증이나 다른 자가면역질환의 진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앞으로 자폐증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양극성 장애 같은 질병과 관련된 유전적 특징을 더 많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보완할 점도 있다. 미국 아이칸 의대의 사미라 아스가리 교수는 이날 ‘네이처’에 실린 논평 논문에서 “감염을 막는 데 도움을 줬던 유전적 변이가 나중에는 과잉 면역반응을 불러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유발했다는 가설은 구체적 증거가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미라 교수는 가설을 입증하려면 자가면역질환의 위험과 특정 병원체에 대한 면역반응을 연결하는 생물학 메커니즘을 규명할 실험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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