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미술관 산책 <6>]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담긴 메시지들
프랑스 파리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예술의 도시로 불린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수준 높은 미술관이 한몫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예술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거대한 모네의 수련 연작을 그리고 세계의 박물관인 루브르에서는 역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파리의 작은 미술관인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는 특별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관람객들에게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명상적 분위기를 제공하기 위해 그림 높이의 의자에 앉아 그림을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상주의를 연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이 작은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이다. 1940년 소장자가 A4 용지 두 장 크기의 작은 그림인 ‘인상, 해돋이’를 이 작은 미술관에 기증했다.
인상파 운동에 영감을 준 그림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1872년 11월 어느 날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과 센강이 만나는 무역의 중심지인 르 아브르(Le Havre) 항구를 찾았다. 기록에는 여행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그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 생활했던 고향이었다. 르 아브르를 찾았을 당시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기운으로 무역은 활발했고, 르 아브르 항구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활기찬 기운이 넘쳐났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암울한 시기였다.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이 프랑스의 패전으로 끝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네 자신에게도 이 시기는 역경의 시간이었다. 1870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결혼하는 바람에 아버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더구나 전쟁의 여파로 징집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해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1년 전에 돌아가셨고, 전쟁의 상처와 경제적인 어려움, 작가로서 미래는 불안했다. 여러모로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는 힘든 시기였다.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고향을 찾은 그는 고향 호텔의 창문을 통해 해돋이를 바라보며 재빠른 터치로 여러 색깔의 물감을 사용할 틈도 없이 일출 장면을 포착해 짙푸른 회색과 떠오른 태양을 주홍빛으로 표현하여 그림을 완성했다. 그가 인생의 기로에서 고향을 찾아와 유년시절의 추억과 희망을 담아 호텔 창가에서 그린 그림이 바로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인상파 운동에 영감을 준 ‘인상, 해돋이’다.
모네의 눈에 비친 르 아브르 항구의 일출은 안개 낀 푸른 진회색의 바다 위에 떠올랐다. 마치 암울한 짙은 회색빛의 현실 속에 희망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왼쪽 공간감이 느껴지는 노 젓는 세 척의 목선은 과거의 추억을 암시하고, 항구 부두의 크레인과 증기선은 산업혁명으로 역동하는 프랑스의 현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림 속에서 모네는 과거와 현재를 한 공간 속에 녹여내고 있다. 그리고 상상이 아닌, 현실의 인상적인 장면을 나타내기 위해 느슨한 붓놀림으로 빛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매연으로 덮인 하늘과 바다 빛깔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전체적인 색채는 진회색의 우울함이 묻어나고, 산업화로 뿜어나온 매연은 안개가 낀 것처럼 일출에 스며들어 빛의 효과를 증대시킨다. 2014년에 모네를 연구하던 전문가들은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그림이 그려진 정확한 날짜를 파악하기 위해 그림을 분석한 결과, 르 아브르 항구의 기상, 날씨 기록 중 그림에 나타난 아침 안개와 그림 속의 바람 방향 등을 토대로 이 그림이 1872년 11월 13일 그려졌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인상, 해돋이’를 자세히 보면 인상주의적 특징이 잘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침 항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실사 그 자체는 아니다. 모네가 그림을 그렸던 호텔 창가에서 보면, 원래 왼쪽에는 눈에 거슬리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모네는 그 집을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인상파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붓질은 성의가 없을 정도로 세밀하지 않고 대충 그린 듯 방향성 없이 나타나고 있고, 색채는 혼합하지 않고 원색을 다른 색채 위에 덧칠하듯 채 마르지 않은 듯한 질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마디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당시의 아카데믹한 시각으로 보면 묘사는 부족하고, 미완성 그림으로 인식될 정도로 비난의 소지가 있었다.
부흥과 희망의 메시지도 담아
‘인상, 해돋이’는 그가 전쟁의 징집을 피해 영국으로 도피해 있는 동안 그곳에서 인기를 누리던 윌리엄 터너(Turner)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터너의 1830~40년에 그려진 수채화 작품인 ‘일몰’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와 유사하다. 터너는 ‘일몰’에서 산업혁명으로 유발된 매연 상태의 안개를 묘한 신비감과 사진이 표현하지 못하는 파스텔 느낌의 미적 장면으로 표현했다. 특히 터너는 태양의 일출, 일몰 장면을 통해 가장 감정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그림에 담았다. 그는 다양한 소용돌이치는 하늘의 빛과 대담한 색상 배열을 통해 자연의 숭고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낭만주의 작가로 불린다. 영국에서 터너의 작품을 경험한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통해 빛의 효과와 인상주의적 표현 방식을 새롭게 추가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했다.
‘인상, 해돋이’는 그림이 완성된 후 2년이 지난 1874년 공식 살롱전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열린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네는 그림을 출품할 당시에 제목을 ‘인상, 해돋이’라고 지었는데, ‘해돋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작품은 기존의 일반적인 작품들과는 다른 어딘가 엉성하고, 세밀한 묘사가 없어서 그리다 만 미완성 같은 화풍이었기 때문이다. ‘인상’이라는 제목을 추가함으로써 그의 그림은 더 이상 사실적인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그림이 아닌 자신의 자의식이 들어간 그림으로 탄생했다.
사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모네나 모네를 조롱한 루이 르르와(Louis Leroy)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풍경화라는 장르를 선호했던 이전의 바르비종파에서 활동하던 마네를 비롯한 일련의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인상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모네도 그의 작품에 ‘인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그가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에 고향인 르 아브르를 찾아 그린 그림이다. 그는 ‘인상, 해돋이’에서 패전으로 혼란하던 조국 프랑스에는 부흥을, 인생의 힘든 자신에게는 희망을 담아냈다. 그리고 인상주의에 영감을 준 이 그림을 통해서 새로운 미술사에 해돋이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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