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이 내려와서 직접 피고인 확인하세요”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반정부 활동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진보당 제주도당위원장 등에 대한 1심 재판이 기소된 지 9개월여 만에 첫 공판이 열렸다.
하지만 피고인과 변호인들이 재판 도중 재판정을 임의로 나가면서 파행적으로 진행됐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진재경)는 29일 오후 2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강은주(54)·박현우(49) 전 진보당 제주도당위원장과 고창건(54)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 사건에 대한 공판을 진행했다. 지난해 4월 검찰이 기소한지 9개월여 만에 열린 첫 공판이다.
이날 재판은 시작부터 재판부와 변호인 측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재판장이 피고인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이름과 직업, 주소를 묻는 질문에 피고인들이 진술을 거부했다. 특히 마스크를 쓰고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강은주씨에게 일어설 것과 마스크를 벗어줄 것을 요구한 재판부의 요청에 변호인측은 “형사소송법에 근거가 없다. (피고인은) 환자입니다. 판사님이 내려와서 직접 신분증으로 확인하세요”라며 이를 거부했다. 다른 피고인들도 인적사항 요구에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0여 분 가까이 이어진 피고인 인적사항 확인 실랑이는 검찰 측이 ‘피고인들이 맞는다’고 확인하면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어진 검찰 측의 공소 유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재판부와 변호인 측이 충돌했다.
변호인 측은 “재판부가 공판 조서 변경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설명도 없이 재판을 진행하려고 한다”며 “이에 대해 이의신청을 했지만 재판부의 판사간 협의 없이 재판장이 독단적으로 이의신청을 기각한 것은 형사소송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항의를 이어갔다. 결국 피고인과 변호인 측은 재판부가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재판이 시작된지 25여 분만에 재판정에서 퇴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검토한 결과 피고인과 변호인 측이 모두 임의로 퇴정한 경우에도 재판을 진행한 사례가 있다”며 피고인이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했고, 검찰의 공소 유지 설명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재판은 피고인 측이 국민참여재판을 요청하면서 지연됐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이 사건은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국가보안법에선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법원 판례만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오늘날 북한이 반국가단체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국민참여재판을 희망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공소사실 내용이 매우 많고 향후 밝혀질 사실관계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는 점, 일반인에게 생소한 법적 개념에 대해 신중한 법리적 검토가 필요한 점, 증거의 증거능력과 공소사실에 대한 심리를 하는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점 등을 들어 국민참여재판을 배제했다.
국민참여재판은 통상 재판부 설명, 배심원 평의·평결, 토의를 거쳐 선고까지 하루 만에 끝난다.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들이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해 관련 증인 수와 검토해야 할 증거자료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하루 만에 사건 심리부터 선고까지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 고려됐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이에 불복해 항고했다. 하지만 2심에 이어 대법원도 “재판에 영향을 미친 헌법과 법률, 명령 또는 규칙을 위반한 잘못이 없다”며 항고를 기각했다.
국민참여재판 관련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구속 기한(최장 6개월)이 만료돼 피고인들은 모두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다.
강 전 위원장은 지난 2017년 7월 29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북한 노동당 대남 공작 부서인 문화교류국(옛 225국) 소속 공작원 3명을 만나 이적단체 설립과 운영방안에 대해 논의한 혐의다. 당시 강 전 위원장은 공작원으로부터 지령과 간첩 통신교육, 장비를 받았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이후 강 전 위원장은 박현우 도당위원장과 고창건 사무총장과 공모해 제주에서 이적단체 ‘ㅎㄱㅎ’을 조직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북한 문화교류국으로부터 조직 결성 지침과 조직 강령·규약을 전달받았으며 노동과 농민, 여성 등 부문 조직 결성이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혔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이들은 수시로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들과 외국 이메일 계정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해 교신하는 ‘사이버 드보크 방식’으로 지령과 보고서를 주고받았다.
검찰은 “이들은 지령에 따라 진보당 도당 당원 현황을 보고하거나 ‘전국민중대회’와 ‘한미 국방장관 회담 규탄 기자회견’ 등을 통해 반정부 활동을 선동했다. 또 북한 대남공작전략에 이익이 되는 민주노총 투쟁 일정, 이적단체 후원회 명단, 진보단체 동향 등의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또 이들 이적단체가 성장 가능성 있는 지역정당 대표와 시민사회단체 대표를 포섭해 그 영향력을 활용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진보당과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주노총 등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정당과 노동, 농민단체에 진출해 해당 단체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려 했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공판준비 과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은 공소사실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특히 “검찰 증거를 보면 대부분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다. 일부 증거는 해외에서 사법공조를 거치지 않고 이뤄지는 등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이거나 영상 증거는 원본 동일성이 의심된다”며 검찰 증거도 문제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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