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M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낸 광기와 지성의 혁신가
1990년대에 시작되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보다 왕성하게 전파된 ‘IDM(Intelligent Dance Music)’은 여느 전자음악들이 댄스플로어에서 주로 활용됐던 것과는 달리 집에서 감상하기에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다.
음악가가 직접 설계 및 제작한 가상악기들을 기초로 다양한 실험이 전개됐고 이는 오히려 춤추기 위한 도구로써의 기능 보다는 소리의 확장의 개념에 더 가까웠다.
사실 ‘지능적인 댄스 뮤직’이라는 명칭 자체가 트집 잡히기에 딱 좋은 것이 사실인데, 그래서 몇몇 이들은 ‘브레인 댄스’라 부르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IDM은 점차 ‘레이브’라는 단어가 낡고 퇴색되어갈 무렵, 보다 지적이고 순수한 전자음악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대안처럼 등장했다.
IDM은 오브나 KLF 같은 이들이 설계한 앰비언트 기반 사운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보다 복잡하고 지능적으로 진화해 나갔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는 영국의 전자음악 명가 ‘워프(Warp)’가 있었다.
‘인텔리전트 댄스 뮤직’이라는 용어 자체가 워프 레이블의 1992년도 컴필레이션 <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했다.
오테커, 스퀘어푸셔, 보즈 오브 캐나다 등의 스타들이 워프에서 배출됐는데, 이들 모두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흐름에서 가장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것은 단연 에이펙스 트윈이다.
정작 에이펙스 트윈은 IDM이라는 명칭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이 장르의 이름을 두고 기본적으로 이 음악은 지능적이고 다른 음악은 멍청하다 말하는 셈이라며 IDM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밝혔다.
에이펙스 트윈 자체가 IDM을 넘어 별개의 장르라 말할 수도 있겠는데, 대략의 성분분석을 해보자면 테크노, 앰비언트, 글리치, 정글, 레프트필드 하우스, 디지털 하드코어, 그리고 드릴 앤 베이스 등이 기이하게 결합되어 있다 하겠다.
리차드 D. 제임스, 에이펙스 트윈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이 사나이는 현대 전자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라 할 수 있다. 가급적 외부의 노출을 자제했던 에이펙스 트윈은 때문에 여러 신화가 생겼다.
반쯤 잠든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고, 3일 연속 잠을 안자며 신시사이저를 직접 제작하고 10대 때 만든 트랙들은 수천개가 존재한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다.
처음 음악으로 번 돈으로는 군용 탱크를 구입했으며 DJ 퍼포먼스 시 사포와 주방에서 음식을 갈 때 쓰는 믹서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기행들이 그의 음악보다 앞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다.
영국 콘월에서 성장한 에이펙스 트윈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만드는 것 보다 소리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었고, 피아노 내부의 현, 그리고 테이프 장비들을 분해하기도 했다.
11세 무렵에는 사운드카드가 없는 가정용 컴퓨터로 사운드를 개발하는 대회에 참여해 50파운드를 받기도 한다.
10대 시절부터 꾸준히 음악을 작업하는 와중 대학에서는 공학 분야를 전공하고 학위를 취득했다. 꾸준히 DJ 활동을 하며 데뷔 이전부터 유럽 전역을 돌았고 EP <Analogue Bubblebath>로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1992년 R&S에서 발매한 데뷔 앨범 <Selected Ambient Works 85-92>로 에이펙스 트윈은 완전히 판도를 뒤바꿔 놓았다. 이는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개념을 확장한 작품이었고, 테크노가 단순한 댄스 음악 그 이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낸 걸작이었다.
워프와 계약한 이후 발표한 <Selected Ambient Works Volume II>는 보다 순수한 앰비언트에 집중한 작품이 됐고 이후 이어지는 워프에서의 커리어를 통해 전자 음악의 새역사를 써내려 간다.
1995년 작 <…I Care Because You Do>는 당시 에이펙스 트윈이 구현가능한 아날로그 기술의 집약과도 같았다. 이는 기술적 관점 뿐만 아니라 미적 관점에서도 기존에 그가 의존하던 거의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정하기 전 마지막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Richard D. James Album>에서 에이펙스 트윈은 디지털 기술로의 확고한 전환과 동시에 미래로의 전환을 선포했다.
그는 이 장르, 더 나아가 음악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고 열정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홀로 개척해갔다. 수록곡 중 ‘To Cure a Weakling Child’의 경우 국내 통신사 CF에 삽입되기도 하면서 익숙해지기도 했다.
이후 발표한 두 장의 EP <Come to Daddy>와 <Windowlicker>를 통해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에이펙스 트윈은 거의 비인간적인 속도로 기계와 엔지니어링을 흡수했고, 이 두 장의 EP들은 그의 음악이 기존 관습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언더그라운드를 넘어 주류 음악계와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에이펙스 트윈의 'A'자 로고, 그리고 악랄한 미소는 90년대에 있어 하나의 아이콘 같은 것이 됐다.
에이펙스 트윈의 본질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라디오헤드가 에이펙스 트윈의 작품들에서 영향 받아 완성한 <Kid A>를 내놓았을 때 IDM의 오리지네이터였던 에이펙스 트윈은 그런 양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연스러운 피아노 곡들을 수록한 <Drukqs>를 비슷한 시기 발표한다.
에릭 사티와 존 케이지에게서 영향 받은 <Drukqs>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피아노와 세심한 프로그래밍을 바탕으로 완성됐고 오히려 과거 그의 곡들과는 상이한 성격의 잔잔한 피아노 곡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 중 ‘Avril 14th’의 경우 칸예 웨스트의 ‘Blame Game’에 샘플링되기도 했다.
이후에는 자신의 레이블 리플렉스에서 <Analord> EP 시리즈들을 내놓았고 약 10여년 만에 다시 워프로 돌아와 <Syro>를 공개한다.
특히 앨범 커버는 앨범 제작 기간 사용한 활동내역비용들을 열거해 놓기도 했으며, 레코딩에 사용한 오디오 장비 138개의 목록 또한 나열해 놓기도 했다.
<Syro>를 두고 스스로가 초기로 돌아왔다 말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초창기 애시드 하우스의 느낌, 담배와 맥주 냄새가 배어든 어두운 클럽의 연기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취해 있던 바로 그 시절의 감각이 있었다.
<Syro>는 2015년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당연하게도) 에이펙스 트윈은 시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펙스 트윈은 요란한 거품뿐인 것만 같은 대중문화의 환경 속에서 마치 수수께끼의 인물인 냥 특정한 거리감을 유지해왔다. 오늘날의 뮤직 비지니스에 있어 가장 독특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임에도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앨범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가 직접 프로그램과 툴을 제작했고, 그럼에도 학구적이라기 보다는 괴팍하고 유쾌한 이미지가 강했다.
노래 구조와 앨범 커버, 그리고 (크리스 커닝햄이 감독한) 비디오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시대를 아득하게 앞서가는 것이었으며 그의 진취적인 창작법은 새로운 세대의 전자 음악가들로 하여금 실험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끔 하는 데에 일조했다.
한 두가지 음악적 아이디어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았고 그것이 불확실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매회 구조와 사운드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단순히 파격이나 실험의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 쉽게 납득할만한 결과물을 도출 시켜내면서 다양한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렇게 그는 후대 뮤지션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방식대로 끊임없이 밀어붙여도 된다는 태도, 그리고 가능성을 열어줬다.
이 전무후무한 기술의 선구자는 자신의 세대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작가였으며, 다음 세대에게 있어서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천재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흔하고 가볍게 남용되는 현실이지만 정말로 천재라는 호칭을 단 한사람에게만 적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에이펙스 트윈을 위해 아껴두어야 할 것이다.
☞ 추천 음반
◆ Selected Ambient Works Volume II(1994 / Warp, Sire)
에이펙스 트윈이 이 앨범을 발표할 당시 앰비언트는 아직 장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그것이 장르가 되었다. (스스로는 부인하고 있지만) 브라이언 이노의 직계 후손임을 인지하게끔 하는 작품으로, 평화와 공포, 안정과 고독의 낙차를 적나라하게, 혹은 서서히 체험케 하는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닌 그 속에 잠기게끔 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 혹은 명상이 필요한 시간, 이 보다 적절한 작품은 단언컨대 없다.
◆ 26 Mixes for Cash(2003 / Warp)
게빈 브라이어스, 필립 글라스부터 나인 인치 네일스, 마이크 플라워스 팝스까지 과거 그의 수많은 리믹스 작업물들을 2장으로 정리해낸 컴필레이션. 앨범 제목처럼 돈때문에 한 리믹스 치고는 돈과는 거리가 너무 먼 음향들로 구성되어 있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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