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데이즈’ 윤여정 “감독만 보고 출연 결정”
삶은 불가사의, 흘러가는 대로 가보려고요”
“씁쓸하더라고요. 난 이 자리에 쭉 있었고 주인공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게. 사람이 참 간사하다 싶기도 하고, 이제 와 갑자기 주인공으로 발돋움해야 하나, 마음이 좀 그랬죠.”
‘미나리’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한국의 첫 배우 윤여정(76)은 ‘미나리’ 이후 기자들과 처음 만나 뜻밖의 소회를 털어놨다. 훈훈한 덕담 대신 칼칼한 목소리로 정곡을 찌르는 그의 대화법은 수상 이전과 이후, 달라지지 않았다. 충무로와 할리우드에서 쏟아진 주인공 러브콜을 마다하고 여러 배우가 앙상블을 이루는 소박한 강아지 이야기를 차기작으로 선택했을 때 모두가 의아했지만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다음 달 7일 개봉하는 ‘도그데이즈’의 배우 윤여정을 만났다.
“감독만 보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는 없잖아요. 감독 좋고 시나리오 뛰어나고 개런티 많고 모든 걸 한꺼번에 갖기는 힘들죠. 김덕민 감독과는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닌 취급받을 때 만났어요. 19년 조감독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친구가 입봉할 때 나를 필요로 하면 해야겠다 맘 먹었죠.” 개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사랑스럽고 따뜻한 사연을 엮은 이 영화에서 윤여정은 자식은 외국에 있고 큰 집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강아지를 잃어버려 낙심하는 세계적 건축가 ‘민서’를 연기했다.
“솔직히 캐릭터에 큰 매력은 못 느꼈어요. 내가 할만한 나이의 사람이고 나를 많이 생각하고 쓴 거 같았어요. 처음 시나리오상의 캐릭터 이름도 윤여정이었으니까요. 배우로서 도전이 되는 연기는 아니었던 셈이죠. 제 연기요? 배우니까 스크린에서 볼 때도 아무래도 연기를 집중해 보게 되는데, 흠, 상투적인 연기를 하셨구먼, 했죠.”
설명이나 변명 없이 자신의 연기에 대해 칼같이 평가하고 주어진 현실의 착시 효과를 거둬내려고 하는 그의 노력이 어느 누구와도 다른 배우 윤여정을 만든 동력일 터. 그는 자신을 보고 존경한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너무 부담스럽다. 내 성질 알면 저러지 않을 텐데 생각한다”고 웃었다.
배우로서 사명감이나 공명심이란 단어에 손사래를 치는 그지만 편한 선택 대신 번번이 이름 없는 신인감독이나 가난한 독립영화들에서 고생을 자처해온 것은 아이러니다. 공원 구석에서 몸을 파는 노년의 여성을 연기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등에서 그랬고 ‘도그데이즈’ 다음 출연작품도 독립영화다. “미국도 독립 영화 제작 여건은 한국보다 더 심하다 할 정도로 말도 못해요. 하루에 대여섯 신 몰아쳐 찍어야 하니까 정이삭 감독은 그것만으로도 혼이 나간 상태라 뇌졸중으로 마비가 온 얼굴 분장을 상의도 못 하고 혼자 연구해야 했어요. 입속에 당근도 넣어보고, 오이도 넣어보고 하다가 육포를 넣으니까 좀 자연스럽더라고요. 나중에 영화를 보고 친구가 할리우드 분장이 역시 다르다 해서 웃고 말았죠.”
설 연휴 ‘도그데이즈’는 김영옥, 나문희 주연의 ‘소풍’과 맞붙는다. 자신을 롤모델이라고 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몰라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난색을 표하면서도 “영옥 언니가 나의 롤모델이다. 언니만큼만 하면 되겠다고 늘 생각한다”고 했다. “언니가 저보다 딱 열 살 많거든요. 아직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게 너무 대단하게 느껴져요. 하던 일을 하다가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데 배우는 건강하게 연기하다가 죽는 게 가장 잘 살다 가는 거 아니겠어요? 언니 보면 어떨 때는 놀려요. ‘언니 하나만 해, 힘들게 두 개씩 하지 말고’, 그럼 언니가 ‘얘, 그래도 이거 내가 하면 잘하겠다, 이런 것들이 있어’ 대답하는 데 정말 대단하다 싶어요.”
배우 윤여정은 “그 고생을 하면서 아이작(정이삭 감독)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미나리’ 촬영을 마친 것도 불가사의고 나이 들수록 산다는 게 불가사의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인생이 뜻대로 안 되고 계획해서 되는 일도 없더라고요. 흘러가는 대로 가보려고요. 우선은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하면서 다음 작품 준비하는 게 전부입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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