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동기 “모른다”는 최윤종의 변명, 법원 판단은 ‘여성혐오 계획살인’ [플랫]
출근 중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그것도 한낮의 등산로에서.
지난해 8월 17일 서울 관악구에서 발생한 ‘등산로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초등학교 교사 A씨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교직원 연수 준비를 위해 출근길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택했던 길은 평범한 생태공원의 한 둘렛길이었다. 운동 겸 출근을 위해 평소에도 자주 다니던 길이다.
이곳에서 A씨는 참변을 당했다. 난생처음 보는 남성에게 머리를 여러 번 얻어맞았다. 남성은 소리치며 힘껏 반항하는 A씨의 목을 졸랐다. A씨의 심장이 멎자 옷을 벗기고 인적이 드문 비탈길로 끌고 내려가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A씨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후 숨졌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했다. 그의 이름은 최윤종이었다.
“모른다, 모른다” 최윤종 변명…법원은 “여성혐오 계획살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재판장 정진아)는 지난 22일 최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씨가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을까. 재판부는 사건의 핵심이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계획적 살인’이라고 봤다.
최씨는 재판에서 ‘범행 동기’를 묻는 검사 질문에 거듭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얼버무렸다. 그의 변호인은 “최씨가 단순히 여성과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계획 살인’이라는 검찰 측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최씨의 ‘범행 동기’는 여성에 대한 적개심이었고, 그것이 성폭행을 하기 위한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판결문에 기재된 기초사실에 따르면, 최씨는 2018년쯤부터 “여동생이 교제하는 남자가 집에 드나드는 것이 불만스러워 여동생과 관계가 멀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을 때리고 싶다는 등의 여성 혐오 감정과 여성과 성관계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가족 등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불특정 여성을 성폭행할 것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재판부는 최씨가 경찰 조사에서 “가족과의 관계 단절이 범행 원인의 100%를 차지하는 것 같다”고 진술한 점을 짚었다. 또 “여동생을 싫어하니까 여성 혐오가 생긴 것 같다”“강간은 여동생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 것”이라고 진술한 점 등도 고려했다.
살인 고의·사건의 중대성 전부 인정…여성계 “고무적 판결”
최씨의 ‘책임 회피’는 다방면으로 이뤄졌다. 그는 “피해자가 심하게 저항해서 기절만 시키려 했다”면서 살해하려는 고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오히려 ‘계획적 살인 범행’이라고 보고 이를 가중요소로 적용했다. 재판부는 최씨가 일명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을 접한 뒤 해당 사건의 가해자처럼 여성을 기절시킨 후 강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봤다. 구체적으로 “최씨는 애초부터 범행이 발각되지 않도록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등산객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곳에 그대로 방치하고 현장을 떠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게 되는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예견하면서 범행을 저질렀으므로 이 사건 범행은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계획적 살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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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접한 여성들의 공포도 재판부는 무겁게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결과의 중대성을 설명하면서 “이 사건 범행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등산로에서 대낮에 발생한 것일 뿐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여성을 범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여성들은 야심한 시간이 아닐지라도 안심하고 등산로를 산책하기를 망설이게 되었을 것임이 자명하고, 우리 사회에서 불특정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가 또다시 반복됨에 따라 여성들에게 다시금 커다란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고도 짚었다. 또 최씨가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을 보고 범행을 저질렀듯이 이번 사건의 모방 범죄가 또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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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에서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해 중요한 이해가 담긴 판결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여성들은 계단에서, 건물에서, 사무실에서 언제든지 공격당할 수 있는 불안감에 시달리는데, 대중의 주목을 받은 사건에서 ‘여성은 공포의 희생자’라고 인정했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주로 여성이 피해자가 된 범죄 사건에선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남성 개인의 불우한 가정사나 정신병력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여성혐오 범죄가 평범한 일상을 사는 많은 여성에게도 공포를 초래한다고 봤다는 지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설명했다.
허 조사관은 그러면서도 “이 사건은 피해자를 비난할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범죄처럼 피해자가 이른바 ‘여지’를 줬을 것이라고 하는 사건에서도 (법원이) ‘혐오범죄’라고 명명할 수 있어야 여성 폭력 근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판결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겠지만, 무고한 피해자만 피해자다움을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 사회는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김혜리 기자 harry@khan.kr · 강은 기자 eeun@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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