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도 ‘이길’ 수 있는 원희룡, 이겨도 ‘질’ 수 있는 이재명
‘꽃놀이패’ 쥔 원희룡 vs 꼼짝없이 발 묶인 이재명
(시사저널=박나영 기자)
이른바 '명룡대전'이 현실화할 전망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인천 계양역 인근 지역사무실로부터 불과 100m 거리에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선거사무실이 들어섰다. 이 대표도 앞서 1월12일 유동인구가 많은 이쪽으로 사무실을 확장 이전했다. 조만간 두 후보의 홍보 현수막이 마주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을 가로막은 돌덩이를 치우겠다'며 출사표를 던진 원 전 장관과 '지역구 그대로 나가지 어딜 가겠느냐'는 이 대표, 둘 간의 '빅매치' 성사가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6번 내리 이긴 민주당 강세 지역에 민주당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원 전 장관이 도전장을 냈으니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승부가 펼쳐지는 형국이다.
'헌신과 희생'. 원 전 장관이 이 대표에게 도전장을 내며 내건 명분이다. 이 때문에 이번 선거는 원 전 장관에게 사실상 '꽃놀이패'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 전 장관이 민주당 당대표를 상대로 이긴다면 곧바로 유력 대선주자로 발돋움하고, 진다고 해도 헌신과 양보의 서사로 추앙받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원 전 장관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양지'가 아닌 '험지'에 먼저 나서주면, 비워진 공간에 새 인물을 영입해 국민에게 선보일 수 있다. 험지 출마나 불출마 선언이 상대적으로 적은 집권여당에서 원 전 장관의 선택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런 명분이 있기에 원 전 장관은 설사 선거에서 진다고 해도 전체 총선 판세를 이끈 공신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원희룡, '김건희 호위무사' 이미지 벗어야
서울 양천갑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던 원 장관은 한나라당 시절 개혁소장파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상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의 총애를 받아 당내 주류로 변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 제주지사를 두 차례 지냈다.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후보에 이어 3위를 기록하는 등 대권 잠룡으로 꾸준히 거론돼 왔다. 2022년 대선 당내 경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패한 이후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을 맡아 윤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도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전 법무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내각 3인방으로 꼽혀왔다.
국회의원은 물론 도지사까지 지낸 원 전 장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의원 배지가 아닌 '스토리'다. 원 전 장관의 눈은 코앞의 총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마음은 큰 정치를 향한 '빅픽처'를 그리고 있는 탓이다. 싸워 지더라도 이 대표와의 1대1 구도는 정치적 무게감을 키운다. 자신이 온몸을 불살라 이 대표와 싸웠다는 스토리를 바탕으로 다음 대선주자로 밀어 달라는 여권 지지층을 향한 호소가 포석으로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원 전 장관은 여권 내에서 비교적 중도 확장성이 큰 인물로 알려졌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경험에, 개혁적인 소장파 이미지도 남아있다. 대장동 일타강사로 활약하며 윤석열 정부에 기여한 바도 크다. 그러나 국토교통부 장관으로서 내세울 만한 마땅한 업적이 없고, 오히려 이 기간에 김건희 여사의 호위무사 역할을 자처하면서 합리적이던 이미지가 퇴색했다는 평가도 있다. 원 전 장관은 지난해 7월 '김건희 여사 일가 부동산 특혜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서울~양평고속도로 건설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한 바 있다.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최근에는 그간 언급하지 않았던 김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논란은) 풀긴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천 계양을은 2004년 17대 총선 때 계양구가 갑·을로 분리된 후 2010년 재보선을 제외하곤 민주당이 단 한 번도 승기를 놓치지 않은 지역이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2000년 16대 총선 계양구 단일 선거구에서 승리한 후 17·18·20·21대 총선 때 계양을에서 '불패 신화'를 써내려가며 5선을 달성했다. 딱 한 차례, 송 전 대표의 인천시장 선거 출마로 치러진 2010년 재보선에서 이상권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후보가 당선됐지만, 2012년 19대 총선에서 곧바로 민주당 최원식 후보가 계양을에서 당선돼 2년 만에 탈환했다.
계양을 출마 유력한 이재명, 또 다른 가능성도
현재까지는 인천 계양을에서 이재명 대표의 우세가 점쳐진다. 뉴스토마토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2023년 12월9~10일 이틀간 인천 계양을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505명을 대상으로 '만약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현역인 이재명 대표와 국민의힘 후보로 원희룡 장관이 출마한다면 누구를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에 이 대표는 48.5%의 지지를 얻어 39.3%의 지지를 받은 원 장관을 앞섰다. 이들 간 격차는 9.2%포인트로 오차범위(±4.4%) 밖이다. '그 외 다른 인물' 5.2%, '지지 후보 없음' 4.0%, '잘 모름' 3.0%로 조사됐다.
이 대표로서는 원 전 장관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출마하지 않는다면 '원 전 장관과의 대결이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프레임이 씌워질 것이고, 만에 하나 진다면 정치생명을 잃게 된다. 이길 확률이 높다고 해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 무조건 이겨야 하기에 지역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고 이는 민주당 전체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황교안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전신) 대표가 험지 출마 요구에 떠밀리다시피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전국 유세에 힘을 쏟느라 지역구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패배했다. 이 대표 입장에서는 지역구를 비워두고 전국 유세에 총력을 쏟기 힘든 상황이 된다.
이 대표의 지역구 출마가 유력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는 최근 '지역구 의원이 지역구에 나가지 어딜 가느냐'고 강조했는데, '인천 계양을(출마)은 변함이 없느냐'는 질의에는 "질문이 이상하다"고 답했다. 지역주민들을 저버리는 결단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정을 번복해 비례대표 뒷번호로 나갈 수도 있지만 이는 선거제와 맞물려있다. 준연동형 비례제로 확정되면 위성정당이나 비례연합정당이 출현하는 탓에 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런데 준연동형으로 기울 것 같던 민주당의 선택이 최근 급격히 권역별 병립형으로 바뀌는 듯한 움직임은 의미 심장하다. 다시 비례대표 출마 가능성이 열리는 셈이다. 일각에선 전격 불출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선거를 지휘할 목적으로 이미 불출마를 선언하고 전국을 순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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