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볼모지 '화순 조광조 유배지'에 190억 투자…적절성 논란

천정인 2024. 1. 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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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계획 부활시켜 이름만 바꿔 추진
절차 무시하고 토지매입 강행…"예산 낭비 우려"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전남 화순군이 능주면 조광조 유배지 일원에 190억원을 들여 관광 거점을 조성하기로 해 적절성 논란이 일고 있다.

거점이 필요할 만큼 방문객이 많지 않은 지역인 데다 관광객을 끌어들일 만한 콘텐츠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군은 절차까지 무시하며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조광조 적려 유허비 [연합뉴스 사진]

관광객 없는데 거점부터 마련

화순군은 능주면 조광조 적려 유허비(유배지를 기리는 비석) 주변에 '능주 역사문화도시 거점공간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주변 관광지를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거점 공간을 제공하겠다며 관광안내소와 자전거 대여 등 이동지원 시설을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한 사업이다.

산책로와 광장, 주차장까지 더해지며 축구장 4.5개 크기(3만2천974㎡) 규모에 189억원을 투입한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을 들여 거점 공간을 마련할 만큼 관광객이 많지 않은 곳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관광공사가 차량 내비게이션 데이터를 기반으로 목적지 검색량을 분석한 결과 조광조 유배지는 화순 내 인기 관광지 100위권 안에 들지 못했다.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방문 빈도가 높은 '중심(거점)관광지' 순위에서도 100위 중 90위를 차지했다.

화순군은 이러한 분석 결과를 언급하지 않은 채 다른 데이터 일부만 활용해 관광 기반 시설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사용했다.

이마저도 군이 자체 조사한 방문객 수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능주면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지금까지 이 주변에서 관광객이 찾아온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며 "조광조 유배지가 산책로와 공원으로 개발되면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혜택을 볼 수 있겠지만 관광객이 일부러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고 우려했다.

2022년 개발 계획(왼쪽)과 2005년 개발 계획 [전남 화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년 전 계획 가져다가 이름만 슬쩍

화순군이 처음부터 이 장소에 거점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당초 군은 2022년 조광조 추모시설과 양반 체험 시설(사림문화 체험), 산책로 등을 조성하는 '조광조 유배지 확대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 사업은 20년 전 화순군이 구상했다가 추진하지 못한 사업을 이름까지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당시 문화관광과장으로 재직하던 구복규 현 화순군수가 직접 관여했던 사업으로, 드라마 여인천하 등 사극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암 조광조 선생이 1519년 개혁정책을 추진하다 화순으로 유배(기묘사화)되면서 화순과 인연을 맺게 됐는데,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탓에 지역 내 흔적은 많지 않다.

결국 이 사업은 제동이 걸렸다.

지난해 11월 전남도 투자심사에서 '현대 관광 추세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과 함께 사업을 재검토하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조광조 개인에 집중한 관광지를 조성하는 것은 역사성, 지역 연관성, 경제성 모두 적합하지 않다며 사실상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화순군은 조광조 관련 시설 대신 관광안내소 등으로 채워놓고 '거점 공간'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변경해 계속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조광조 관광지를 조성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업 추진이 어렵게 되자 졸속으로 변경한 계획이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화순군 관계자는 "향교 등 능주권역의 다양한 역사문화자원과 연계한 거점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이라며 "거점이 마련되면 관광객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조광조 적려 유허비 [연합뉴스 사진]

절차 무시하고 예산부터 펑펑…토지매입 강행

화순군은 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절차를 무시한 채 토지 매입부터 시작했다.

지방재정법상 기초 지자체가 60억원 이상 200억원 미만 신규 투자사업을 하려면 광역 지자체의 투자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 미리 적절성과 타당성을 검증해 무분별한 투자와 예산 낭비를 막겠다는 취지로 투자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예산을 편성하거나 집행할 수 없다.

그러나 화순군은 투자심사를 받은 지난해 11월 전 이미 자체 예산 76억원으로 전체 매입 대상 토지 76필지 중 절반가량인 38필지에 대한 매입을 마쳤다.

투자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지만 화순군은 문제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화순군 관계자는 "국비를 확보할 때 가장 먼저 따져보는 것이 사업 부지가 확보됐는지 여부"라며 "사업 부지 확보에 가장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만큼 서둘러 일을 진행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뒤늦게 받은 투자심사는 결국 통과하지 못했고, 사업 내용을 '관광거점 조성'으로 수정해 재심사를 요청해 둔 상태다.

기존 계획에서 부풀려져 있던 경제적 효과 등을 일부 축소했지만, 여전히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이 사업으로 화순군 관광객이 연간 1만2천명씩 늘어나고, 유지비를 충당하고도 연간 10억원의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분석을 담았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기우식 정책위원은 "투자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채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법이고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라며 "심각한 일탈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역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관광진흥 정책을 마련할 수 있지만 예산 낭비가 되지 않도록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며 "지자체장의 치적을 만들기 위해 예산이 낭비된다면 지역에도 불행한 일"이라고 우려했다.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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