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실패하려고 애쓰는 대통령 [강준만 칼럼]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최근 대통령 윤석열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한동훈 사이에 벌어진 2박3일간의 충돌 사태는 세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 한동훈이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김건희 리스크’와 관련된 사전 합의가 없었다. 여권에서 한동훈을 모셔 가려 한다면 한동훈은 윤석열의 ‘양보’를 얻어내는 걸 조건으로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래서 ‘짜고 치는 고스톱’ ‘약속대련’이라는 말이 나왔겠지만, 이는 반윤 인사들의 정략적 시각이라는 한계가 있다. 한국 정치는 자주 상식을 초월하곤 하니 여기선 충돌 사태의 진정성을 전제로 이야기해보자.
둘째, 윤석열은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망각하고 배신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에 분노하던 ‘공정과 상식’의 화신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실은 김건희의 ‘명품백 수수 의혹’과 관련해 “함정을 파서 궁지로 몰아넣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지적일망정, 문제의 핵심은 윤석열에겐 자신의 부인을 대상으로 한 ‘정치공작’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 여러 면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판단하는 국민은 안중에 없다는 점이다.
셋째, 윤석열은 민심에 벽을 쌓은 채 무엇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할지를 파악할 수 없는 판단 불능 상태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김건희 리스크’를 정권의 치명적 급소로 키워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아내를 추앙하는 순애보를 완성하는 게 대통령이 된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그게 그에겐 민심의 지지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게 분명해졌다.
우리 모두의 이성적인 판단을 위해 이른바 ‘119 대 29’ 사태가 일어난 지난해 11월29일로 돌아가 보는 게 좋겠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사우디 리야드가 119개국(72%) 득표를 해 29표(18%)를 얻는 데 그친 부산을 누르고 2030년 엑스포 개최지로 결정된 날이다. 이 사건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단지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119 대 29’라는 4배 격차가 문제였다.
국내 홍보를 어찌나 요란스럽게 했던지 은근히 부산이 이길 걸로 기대한 국민이 많았다. 그런데 아슬아슬하게 진 것도 아니고 완전한 참패였으니, 정권에 대한 신뢰가 크게 추락했다. 야권 원로 유인태가 그 충격을 잘 표현했다. “우리 외교부니 국정원이니 또 재계니 알고도 대통령 눈치 보느라고 말을 못 했는지 모르겠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것은 ‘야, 이런 정부를 믿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나’ 이런 절망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김건희 리스크’도 마찬가지다. 그 리스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는 대통령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국정 운영 자세와 관련된 신뢰의 문제다. ‘명품백 정치공작’은 분노할 만한 일이다. ‘몰카’ 영상을 1년 넘게 묵혔다가 총선 국면에서 터뜨린 게 악의적인 공작이라는 걸 국민이 모르는 게 아니다. 국민은 국정 운영의 기본 시스템이 훼손되고,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해왔던 공정과 상식을 스스로 배반하는 행태에 분노하는 것이다.
한번은 공작에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번 당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버릇이다. 2년 전 대선 50여일을 앞두고 ‘김건희 7시간 통화 녹취’가 공개된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당시 윤석열 캠프는 ‘정치공작’이라며 펄펄 뛰었지만, 일부 언론은 “윤 후보 측이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배우자에 대해 적절한 조언을 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김건희가 자신의 정치감각이 탁월하다고 믿고 있으며, 남편이 대통령이 된 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써왔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그걸 말려야 할 남편이 부인의 그런 시도를 사실상 지지했고, 그러면 안 된다고 고언을 하는 주변 인사들에게 불같이 화내는 등 성역화함으로써 ‘김건희 리스크’를 키우는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단 말인가?
지금 이 나라 정치는 상대를 죽여야만 사는 전쟁인 양 미쳐 돌아가고 있지만, 그건 결코 정치가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어느 정당이건 혁신하고 성공해야 한다. 누가 더 큰 혁신과 성공을 했느냐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집권여당이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아내 사랑 때문에 극심한 내홍을 겪게 되면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어려워지고 정치는 민생에서 더욱 멀어져 자기들끼리 싸움판으로 전락하고 만다. 멀리 내다보자. 윤석열이 스스로 실패하려고 애쓰는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대통령실까지 1.5㎞ 기어간다…‘이태원 특별법’ 마지막 몸부림
- 윤-한 오찬 회동…‘갈등 씨앗’ 명품가방은 또 논외
- 금메달 김현겸, 한국 남자 피겨 역사 새로 쓰다
- 자식 잃은 부모의 새까매진 이마를 보십시오 [만리재사진첩]
- 류희림, 정권 보위용 심의 반대한 팀장 7명에 ‘막장 좌천 인사’
- [현장] 가림막 치고 ‘강제동원 추도비’ 철거…한마디 못 하는 윤 정부
- 고 이선균 주연 ‘잠’ 제라르메 영화제 대상
- ‘구속영장’ 김종국 전 기아 감독…후원업체서 억대 금품수수 혐의
- 전장연 박경석의 자부심… “고통스러워도, 고통이 기쁨 아닌가”
- 4월에 가는 푸바오, 중국과 사이 좋아지면 돌아올 수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