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 없어?" 60번 협박 전화한 '그놈 목소리'…아이는 이미 죽였다[뉴스속오늘]

마아라 기자 2024. 1. 29.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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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대 미제사건으로 남은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
/사진=KBS 뉴스

1991년 1월29일. 초등학생 이형호군(당시 9세)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유괴된 뒤 43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아이를 유괴한 뒤 부모에 협박과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무려 60차례나 했으나 경찰을 피해 갔다.

해당 사건은 2007년 영화 '그놈 목소리'가 다루면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사건 발생 3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범인, 수차례 장소 변경…잡히지 않으려 치밀함 보여

이군이 유괴된 날 밤 11시, 이군의 집으로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의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범인은 "형호를 데리고 있다. 돈 7000만원과 카폰이 달린 자동차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요구했다. 이군의 목숨을 담보로 경찰에 신고하지 말 것을 협박했다.

부모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강남 서초경찰서 형사인 척 전화를 거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전화를 받을 당시 형사들의 기지로 범인의 의심을 피했다.

/사진=영화 '그놈 목소리' 스틸컷

범인은 각종 배경지식을 가지고 여러 차례의 통화에서 경찰에 잡히지 않으려는 치밀함을 보였다. 위치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공중전화를 사용했고 4분을 넘기지 않았다. 약속 장소를 계속해서 변경하며 미행이 있는지 확인하고 따돌렸다. 지정 장소에서는 메모지를 붙여 내용을 지시했다. 메모지에는 지문이 묻지 않았다.

1월31일, 범인은 돈 가방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한 뒤 장소를 계속해서 바꿨다. 경찰의 미행을 감지한 범인은 전화로 "지금 누군가가 주변을 계속 얼쩡거리고 있다. 경찰에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애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분명히 말했다. 연락하지 말라고"라고 피해자 부모를 추궁했다. 이날 범인은 하루 동안 총 16차례의 협박 전화를 걸었다.

범인은 돈 가방 회수에 실패하자 아이의 몸값을 차명계좌로 입금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해당 차명계좌가 개설된 은행은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은 곳들이었다.

◇아이 목숨 들먹이며 협박…경찰, 3차례나 잡을 기회 놓쳐

/사진=KBS 뉴스
이군이 유괴된 지 3일째 되는 날인 2월1일, 범인은 피해 부모가 준비한 돈 가방에 접근하려던 중 잠복 중인 경찰의 제스처를 보고 도주했다. 경찰은 머뭇거리다 검거에 실패하고 말았다.

13일 범인은 이군의 집에 전화를 걸어 재차 돈을 요구했다.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없다. 형호가 죽기를 바라나?"라고 잔뜩 겁을 주며 현금 5000만원을 들고 자신이 지시한 장소로 올 것을 요구했다. 범인은 "마지막이니 신경 쓰라"라고 경고하며 "형호를 제가 데리고 있다고? 하하하"라고 웃기도 했다.

해당 장소에서 메모를 발견한 이군의 아버지는 '양화대교 남단 올림픽대로 첫 번째 교각 철제 배전반 위에 돈 가방을 놓고 가라'는 메모를 발견했다. 이군의 아버지는 현금 10만원과 신문지를 섞은 돈뭉치를 가방에 넣어 갖다 놓았다.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지만, 범인은 가방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돈을 가져간 범인은 다음 날 새벽에 전화를 걸어 "가짜 돈이 잔뜩 섞여 있다. 아들을 되찾고 싶지 않은 것으로 알겠다. 다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감사하다"라는 말을 남긴 채 연락을 끊었다.

19일 범인은 한 차명계좌에서 현금인출을 시도했다. 은행 직원은 '사고 신고' 계좌라는 문구가 뜨자 당황해했고 범인은 문제가 생긴 것을 눈치챈 뒤 황급히 달아났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범인의 연락은 없었다.

◇범인은 혼자 아닌 여러 명?…공소시효 만료

/사진=영화 '그놈 목소리' 스틸컷
한 달이 지난 1991년 3월13일, 이군은 사라진 지 43일 만에 눈, 귀, 입, 손발이 묶인 채 한강 둔치의 배수로에서 발견됐다. 조사 결과 이 군은 납치 직후에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두피 아래 출혈로 보아 폭력을 당한 정황도 드러났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 피해자 부모를 괴롭힌 잔혹한 범죄였다.

범인은 차분하고 냉정한 말투에 정확한 영어 발음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흥분한 상태에서도 존칭을 사용했다. 범인의 몽타주는 범인을 마주친 은행원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됐다. 이군이 발견된 다음 날부터 수사는 공개로 전환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범인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이군의 친척인 이상재(가명)와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상재는 이군 생모와 가까운 인척으로, 이혼 당시 이군의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으며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재가 사건 당시 경주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면서 알리바이가 증명돼 사건은 원점이 됐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범인은 서울·경기 출신의 30대 전후 남성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28만 장의 전단과 음성 테이프 1000개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범인은 통화에서 '우리' '저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신을 단순 가담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음성분석 결과는 동일 인물이나 계속해서 장소를 옮기며 메모를 전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여러 명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은 2006년 1월29일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공소시효 폐지 법안이 통과됐지만 사건이 벌어진 지 오래돼 이를 적용받지 못했다.

2019년 경찰은 해당 사건 재수사에 나선다고 밝혔다. 서울지방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이 수사를 이어갔으나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마아라 기자 aradazz@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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