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시민이라는 정체성
여자 친구와 2주 동안 인도네시아 발리섬에 다녀왔다. 그렇게 오래 해외에 나간 것도 처음이었고, 비행기를 8시간이나 타고 이동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출발부터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우리가 안심할 수 있었던 건 응우라라이 공항 앞에서 기다리던 가이드 수까 씨 덕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수까 씨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능통했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우리가 여행할 각 지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긴 여행을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가이드였다.
수까 씨가 운전을 도맡아 주었기에 우리는 공항에서 가까운 지역인 꾸따나 스미냑 외에도 좀 더 내륙에 있는 우붓이나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 아메드까지 여행 계획에 넣을 수 있었다.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도로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와 창밖으로 우거진 야자수 풍경이 생경했다. 특히 길목마다 정치인으로 보이는 이들의 사진이 담긴 현수막이 빼곡했는데, 그중에서도 두 남자가 나란히 서 있는 붉은 현수막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인도네시아 곧 선거 있어요. 저 현수막에 있는 사람들, 대통령 후보랑 현직 대통령 아들이에요. 대통령 아들 이번에 부대통령 후보로 나와요.”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수까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법 복잡했다. 현직인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3선 제한 규정으로 이번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그의 아들 기브란이 유력 대선 후보인 프라보워와 함께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브란의 나이였다. 그는 1987년생(37)으로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부대통령 피선거권을 40세로 제한하는 규정에 위배된다. 원래라면 입후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작년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에서 ‘이미 지방선거와 총선 등의 선거에서 승리한 후보’에게는 예외를 허용하며 출마 길이 열렸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그것 때문에 시끄러워요.”
관광지로 유명한 발리섬이지만 이곳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었다. 우리에게는 생경한 풍경 정도로 여겨지는 저 현수막들도, 수까 씨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국민에게는 중요한 쟁점과 맥락이 포함된 삶의 일부인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라는 정체성은 그런 시끄럽고 복잡한 사정에서 우리를 한발 떨어트려 놓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모든 걸 관망할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무척 얄팍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국내 정치나 사회문제에 통달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물론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면 좋든 싫든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올 4월 총선을 앞두고 연일 다양한 정책과 정무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8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 문제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나는 정치 같은 것 모른다”거나 “어렵고 나쁜 말해서 뭐하나” 등의 흔한 이야기처럼 우리는 너무 쉽게 일상과 정치를 분리시킨다. 뉴스나 신문을 가득 채우는 논의들도 금세 자신과 관련 없는 일로 여기며 관망한다. 시끄럽고 복잡한 일이 모두 보이지 않는 선 너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분리가 주체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력함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살지 않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거나,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했거나, 그 외에도 저마다의 이유로 선 밖에 서 있는 이들은 시끄러운 정치적 논의 속에서도 소외감을 느낀다. 그들에게 정치는 마치 생경한 풍경이나 낯선 언어로 가득한 나라와 다르지 않다. 정말로 ‘나와 관련 없는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거리감을 회복하자는 제안도, 선 밖의 삶을 편입하라는 요구도, 결국 정치가 대변할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 금방 떠날 여행자가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어떤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그 목소리가 필요하다. 시민으로서 당신이 느끼는 가장 솔직하고 진실된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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