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

경기일보 2024. 1. 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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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소통협력실장

아이가 참치 캔에 손을 다쳐 피가 났다. 누구의 잘못일까? 집에서 애 하나 제대로 돌보지 않은 엄마 탓일까, 아니면 조심성이 없어 노상 다치고 다니는 아빠를 똑 닮아서일까? 이렇게 옥신각신 다투다 이 가정은 이혼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뚜껑을 부드러운 알루미늄 포일로 만들어 누구나 안심하고 딸 수 있는 참치 캔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시, 아이가 다친 건 여전히 개인과 가정의 잘못인가? 사회나 환경의 문제는 아닌가? 왜 그 회사는 캔 뚜껑을 따기도 힘들고 위험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다치게 하나? 소비자 안전보다는 다른 가치를 선택했겠지? 한편 생산품 안전 규제를 해야 할 정부는 그 역할을 다했는가?

1970년대 미국 유명 디자인 회사에서 새로운 냉장고 디자인을 고민하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관절염을 앓거나 손 힘이 약한 노인들도 쉽게 열 수 있는 냉장고 손잡이를 만들면 어떨까요?” 막내 디자이너의 제안에 “패티, 우린 ‘그런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하지 않아”라며 선배들은 무시했다. 고민 끝에 스물여섯 살의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그런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80대 할머니로 변신한다. 다리에 철제 보조기를 차고, 흰 머리 가발과 주름 분장에 솜으로 귀를 막고, 뿌연 안경과 지팡이를 의지한 채 ‘그런 사람들’의 세상을 경험한 것이다.

3년간 지독한 실험을 통해 그는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 즐기던 일상을 나이 들어서도 즐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가능케 하느냐가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는 할머니가 냉장고 문 열기가 힘들어지자 요리를 포기하는 것을 보고 할머니에게 요리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아드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결국 패트리샤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함께 사용하는 유니버설 디자인 철학을 구현한 바퀴 달린 가방, 양손잡이용 가위, 물이 끓으면 소리로 알려주는 하모니카 주전자, 계단이 없어 편리한 저상버스 등 수많은 제품들을 속속 세상에 선보였다.

통조림 캔 뚜껑을 한 번에 딸 수 없고, 냉장고 문을 쉽게 열 수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 전에 길을 건너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만삭의 임신부 아내, 걸음이 느린 우리 어머니거나 혹은 내 어린아이일 수도 있겠다. 누구에게나 배려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나이가 들어 힘이 다 빠진 어느 날, 덜컹거리고 불편한 버스에 올라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길. 버스기사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곧 설날인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고속버스 타고 고향에 내려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가 쉽고 안전하게 일상을 즐길 수 있으려면 ‘장애물 없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생활환경’이 더 많이 조성돼야 함을 새롭게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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