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암호는 “식기세척기”, 반도체 세정기술 빼갔다
국정원 조사관들이 밝힌 기술유출
“큰 잠자리-구름 등 은어로 추적 피해
M&A 가장한 기술 탈취 수법도… AI용 반도체-바이오 등 유출 늘 것”
국가정보원에서 십수 년간 기술유출 사건을 조사해온 A 조사관은 “기술유출범들은 평소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헬리콥터를 ‘큰 잠자리’로 바꿔 부르는 식으로 빼돌릴 기술을 곤충이나 동물 이름으로 부르며 수사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며 이같이 말했다.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의 기술 유출이 증가하는 가운데 동아일보는 22일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에서 기술유출 첩보 수집 및 조사 업무를 해온 조사관 2명을 접촉해 ‘기술 사냥꾼’들의 진화하는 수법을 들었다. 단, 그들의 신상이 특정되지 않도록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기술유출범들이 국내 전문가들에게 접근하는 방식 또한 고도화되고 있다. B 조사관은 “브로커들은 전문성을 가진 핵심 인물이나 특정 장비 기술자 등을 리스트로 만들어 관리한다. 영입 목표를 정해 놓고 호시탐탐 노린다”며 “채용 플랫폼 ‘링크트인’ 같은 곳에서 프로필이나 이력 등을 보고 접근해 무작위로 e메일을 보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조사관들은 핵심 인력을 포섭해 거액을 주며 기술을 빼내오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이고 최근엔 인수합병(M&A)이나 기술 이전 등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가장해 기술을 탈취하는 방법도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앞으로 인공지능(AI)에 필수적인 고성능 반도체와 바이오 등 분야에서 기술 탈취 시도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학원이 규정한 35개의 ‘차보쯔(卡脖子) 기술’도 주요 탈취 대상이다. 차보쯔는 ‘두 손으로 목을 조르다’라는 의미로, 미국 등 선진국에 대한 기술 의존도가 높아 중국의 기술 자립을 막는 분야를 가리킨다. 반도체와 로봇, 항공 엔진, 연료전지, 의료 영상 장비 부품, 촉각 센서 등이 해당된다.
A 조사관은 “중국이 한국과 산업 구조가 유사하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역량도 많기 때문에 기술 유출 국가 중 중국의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라며 “해외 네트워크와 함께 기술 유출에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날로 진화하는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선 예방이 기본이고 사전 징후를 빠르게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재 허술한 보안 업데이트 시간 틈타 설계도 대량 빼돌려”
국정원이 적발한 기술사냥꾼 수법
재택근무 중 회사 내부망 자료 촬영… USB로 장기간 기밀 빼돌리기도
경쟁사 취업제한 피해 위장사 이직… 대기업 협력사 매각때도 유출 우려
수년 전 한 기업에서 설계도면이 대량으로 유출된 사건이 발생했다. 조사 결과 범죄자들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시간을 노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달 22일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한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 A 조사관은 “보안 시스템을 나름 잘 갖춘 기업이어서 도대체 어떻게 도면을 빼돌렸을까 궁금했는데,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시간엔 상급자의 결재 없이도 자료를 무단 전송할 수 있다는 걸 노렸다”며 “찰나를 노려 방대한 자료를 빼내는 대범함과 치밀함에 놀랐다”고 말했다.
기술을 유출하고 또 빼내는 ‘기술 사냥꾼’들은 기업의 이른바 ‘루프홀(허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국정원 조사관들은 날로 진화하는 기술 유출 수법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했다.
● 허점과 빈틈 노리는 기술 사냥꾼들
범죄자들은 장기간 유출에 공을 들이고 알리바이도 만든다. 한 피의자는 “집에서 자료 준비를 하겠다”고 회사에 보고한 뒤 이동식저장장치(USB)로 내부 자료를 여러 차례 반출했다. 장기간에 걸쳐 자료를 빼냈던 그는 퇴직 직전 기밀 자료를 대거 빼냈다. A 조사관은 “피의자는 회사가 USB로 자료를 가져가는 걸 문제 삼는지를 계속 테스트했던 것”이라며 “적발되고 나니까 회사가 문제 삼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말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퇴직 임원의 경쟁사 취업을 일정 기간 제한하는 내규를 둔다. 하지만 기술유출범들은 ‘징검다리 이직’이라는 방식을 통해 무력화하고 있다. B 조사관은 “한 기업이 기술 인력을 빼돌렸는데 원래 하던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회사에서 일을 시켰다. 알고 보니 전 회사와 맺은 전직 금지 기간을 회피하려는 꼼수였다”고 설명했다. 엉뚱한 기업을 징검다리처럼 활용하지만 실제로는 페이퍼 컴퍼니 같은 곳에서 과거 몸담았던 기업의 일과 동일한 업무를 한다는 것이다. B 조사관은 “이직한 ‘위장 회사’가 사실은 전 직장과 같은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라는 걸 수사 당국이 규명해야 하기 때문에 단서와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야 한다”며 “각종 첩보에 대한 가치와 진위 등을 검증하기 위해 현장에서 며칠 밤을 새우며 잠복근무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중국이 2014년부터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반도체 대기금’ 펀드를 조성한 이후 한국의 반도체 핵심 기술과 인력을 영입하려는 시도가 더 거세졌다고 말한다.
● “협력사 기술 유출되면 대기업도 타격”
국정원이 최근 5년간 적발한 38건의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 중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건은 8건이었다. 나머지는 대기업 협력사였다. B 조사관은 “삼성이나 SK, LG 등 대기업들은 핵심 협력업체들의 무분별한 매각을 상당히 우려한다. 협력사들과 상당한 기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대기업이 아무리 보안을 잘 지켜도 협력사 기술이 빠져나가면 대기업의 기술이 빠져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그간 알려진 사건들 외에도 산업 기밀 유출은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2022년에는 국정원의 감시망에 전력반도체 설계 기술이 유출된 정황이 포착됐다. 해당 기술은 정부가 비메모리 분야 강화를 위해 예산을 지원한 연구개발(R&D) 사업의 결과물이었다. 또 지난해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구동용 반도체 설계 자료가 불법 유출된 정황이 포착됐다. B 조사관은 “글로벌 공급망 차질로 인해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고난도 기술이 아니더라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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