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 아니 내 쓰레기를 가져가주세요
“어라? 드디어 나 회귀한 걸까? 아니면 환생?”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다른 시공간에서 눈을 뜨게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으리라. 그만큼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장르는 드라마 영역에서도 익숙한 장르가 됐다. 그중 어떤 이유(주로 죽음)로 ‘2회차 인생’을 살게 되는 회귀물은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상상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매력적이다. 그 매력의 핵심은 ‘능력’에 있다. 회귀물 대부분은 현재의 경험과 지식을 유지한 채 과거로 돌아가 그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복수도 하고 성공도 한다. 그저 보기만 해도 도파민이 상승하는 이런 ‘사이다’ 전개가 없다면 회귀물의 매력은 반감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회귀물’을 검색하면 ‘먼치킨’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딸려온다. 먼치킨은 강력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의미하며, 회귀한 인물도 먼치킨 주인공으로 분류된다. 만화평론가 조경숙은 이런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유가 현실의 “압도적인 격차를 단숨에 뒤집어엎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라 평가한다.
회귀물, 주로 주식 정보 활용해 큰돈 벌어
회귀물에서의 능력은 물리적 ‘힘’일 수도 있지만, 주로 ‘계급과 자본’으로 상상되곤 한다. 2022년 인기몰이를 한 <재벌집 막내아들>(JTBC)처럼 비교적 가까운 과거로 돌아간 회귀물은 주로 주식 정보를 활용해 부를 축적하고 계급 상승을 성취한다. “비트코인(주식) 시세를 미리 다 알고 과거로 돌아간다면?”과 같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종종 만나는 금융자본주의적 욕망이 회귀물로 구현되는 셈이다.
회귀물은 욕망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절망의 반영이기도 하다. 노력만으로는 극복되지 않는 계급 격차 사회에서, 각종 사회적 불의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처럼 여겨지는 내 삶은 “회귀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사회적 불의와 내 삶에 닥친 불행을 사적 복수로 해결하는 복수물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이런 현실에 대한 반발감이 작용했다. 그러나 사적 복수도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과 능력이 필요한 법. 그럴 기회나 능력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불행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이왕이면 능력자로. 그러므로 회귀물은 사적 복수마저 힘든, 공정한 기회가 꽉 닫힌 세계의 절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차근차근 성장하는 인물들의 서사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야 마는 정의 구현 서사는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얻게 된(타고난) 강력한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하는 지름길을 선망하게 된 것이다.
물론 회귀물이라고 해서 ‘성장’이 없는 건 아니다. 동명 웹소설이 원작인 티브이엔(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이하 <내남결>)는 우리에게 익숙한 불륜과 사적 복수 서사에 회귀물이라는 장르를 더한 드라마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남편과 자신을 학대하는 시모에게 시달리며 회사에서 굴욕적 상황을 견디다 위암 4기 판정을 받은 강지원(박민영)은 절친과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날 그들에 의해 죽는다. 그러고는 10년 전인 2014년 4월12일 깨어난다. 지원은 당황하지만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지만 타인에게 전가되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회귀의 법칙을 파악한다. 지원은 자신이 겪은 불행한 운명(남편과의 결혼)을 자신을 배신한 친구인 정수민(송하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즉, 자기 운명을 친구에게 도둑맞아야 살 수 있다. 다른 회귀물 속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지원 또한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 주식을 매수해 재산을 늘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특별히 그런 성공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타인에게 넘기면 된다’
회귀한 뒤 지원은 자기 인생을 꼬이게 한 인물이 수민임을 알게 된다. 사실 지원의 하나뿐인 ‘절친’(이라 우긴) 수민은 모종의 이유(웹소설 원작에는 수민의 사연이 나온다)로 지원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은 인물이다. 수민은 겉으론 웃으며 친절하게 굴었지만, 지원을 친구와 연인으로부터 고립시키고, 회사에서 지원의 성과를 빼앗으며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가스라이팅 해왔다.
지원의 연인(훗날 남편) 박민환(이이경)도 수민 못지않게 지원 인생의 빌런이다. 민환은 “엄마 대신 밥도 하고 돈도 버는 노예 같은” 호구가 돼줄 지원을 결혼 상대로 정하고 끊임없이 지원의 자아를 훼손하는 말과 폭력적 행동으로 지원을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지원의 시모는 또 어떤가. 부모를 잃은 지원에게 “가정교육” 운운하며 상처를 주고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구박한 것도 모자라 지원이 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생계를 책임지도록 강요한 인물이다. 직장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여자는 이래서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직장 상사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지만 아무도 지원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고립시키고 억누른 주변 인물들로 인해 지원은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게 됐고,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살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의 왕따, 직장 내 괴롭힘, 상사의 성과 가로채기, 여성에게 부당한 직장문화와 결혼, 교제폭력, 주변인의 정서적 학대로 인한 자기 비하 등 <내남결> 1회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준 누구나 겪을 법한 현실감 돋는 상황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회귀한 지원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독한 복수를 해도 이해될 정도다.
그러나 지원은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을 부당하게 억눌러온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나답게’ 살기를 선택한 것. 지원은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상황을 반전시켜 회사에서 실력으로 존재감을 증명하고, 동료와의 관계를 개선해나간다. 또한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만나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아 사과를 받아내기도 한다. 이런 전개는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해 확실한 성공을 거두는 다른 회귀물과 다른 지향을 보여준다.
드라마 초반부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동창회 에피소드는 <내남결>만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과거 수민의 계략으로 동창회에서 망신당한 기억이 있는 지원은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참석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런 지원에게 그의 조력자인 유희연(최규리)은 이렇게 조언한다. “안 가면 흑역사로 남지만, 가서 뜯어고치면 역사가 되니까.” 희연의 말처럼 <내남결>은 ‘흑역사’로 남은 경험을 반전시킬 뿐 아니라, 자신을 부당하게 억누르며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게 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인생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에 가깝다.
주인공의 ‘인생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
그래서 <내남결>의 서사를 이루는 한 축은 복수지만 다른 한 축은 ‘자기계발’이다.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반드시 행복해지겠다”는 다짐이 의미하듯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성과를 내며 ‘나답게’ 사는 것. 그러니까 그가 1회차 인생 때는 누리지 못한 평범한 일상을 누리게 되도록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에 비해 다소 소박한 바람이 아닐까? 물론 자신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괜찮은 남자가 하필이면 ‘영 앤 리치-톨 앤 핸섬’인 점과 결혼을 잘못한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던 이력이 있음에도 또 (겁도 없이) 사랑하고 결혼하기를 선택한 점이 한계라면 한계겠지만 그 정도는 지원의 행복을 위해 살짝 눈감기로 하자.
지원과 정반대 입장의 인물은 수민이다.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행복을 성취하려는 지원과는 달리 수민은 지원이 가진 모든 것(심지어 남편까지)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한다. 지원의 인생이 ‘진짜’라면 수민의 인생은 ‘가짜’인 셈이다. 그렇게 가짜로 채워진 수민의 인생은 지원 대신 불행해져도, 심지어 죽어도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수민의 불행을 즐길 준비가 돼 있다.
지원이 ‘나로 살기’를 선택해 행복해지기를 응원하면서도 선뜻 동의되지 않는 면도 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그 대상이 바뀔 수 있다는 회귀 법칙의 함정 때문이다. 지원에게 일어난 불행은 결국 수민에게 전가된다. 1회차 인생 때 수민은 지원이 기획한 사업 아이템을 빼앗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만, 2회차 인생에서는 지원의 방어로 실패한다. 민환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욕망을 충족하려 하지만 도리어 지원이 당했던 고통을 고스란히 겪게 된다. 민환 또한 주식이 폭락하거나 회사에서 해고되는 등 불행한 길을 걷는다.
그들이 욕먹을 만큼 충분히 나쁜 인물로 그려지므로 그런 전개가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과하게 여겨진다. 자기 잘못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타인을 모두의 빌런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자기 불행마저 떠넘겨도 좋을 인물로 여기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도 즐기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요.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반드시”라며 “나는 정수민과 달라요”라고 한 지원의 말은 모순적이다. 지원이 누렸어야 할 평범한 일상을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든 수민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이 내 성공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면
마치 시소게임 하듯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나의 불행을 (빌런인) 타인에게 보내면 된다는 <내남결>의 회귀 법칙은 일견 편리하고 어느 정도는 시원하다. 그러나 수민이 자신을 위해 지원의 모든 것을 빼앗기를 원했던 것처럼, 지원 또한 살기 위해 수민의 인생을 바꿀 수밖에 없도록 내몰린 상황은 타인의 실패와 불행이 내 성공과 행복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는 각박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회귀라는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해 자신을 괴롭힌 사람과 상황에 복수한다는 서사가 별다른 노력 없이 성공하고 싶은 욕망과 순간적인 쾌감을 충족하는 ‘도파민 중독’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해진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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