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 대신 태영이 내라?…밀린 대금, 받을 길이 안 보인다[위기의 건설업]
‘발주자가 직접 지급’ 합의한 사업장 중 최소 25%가 태영 사업장
건설공제조합 보증 중복 가입 안 해…‘미납’ 위험에 무방비 노출
공동시행사 있어도 위험 여전…‘워크아웃 영향 과소평가’ 지적도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으로 대금을 못 받는 하도급사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금융당국,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는 그간 선을 그어왔다. 이미 하도급사를 보호하는 장치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근거로 하도급계약 96%가 건설공제조합 보증에 가입됐거나, 발주자가 직접 대금을 지급하도록 만든 발주자 직불합의를 체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불합의가 체결된 사업장 중 태영건설이 발주자인 경우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기 상황에서 대금을 대신 물어줄 제3의 발주자가 사실상 없는 것으로, 이 계약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28일 경향신문이 국토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태영건설이 체결한 하도급계약 1057건 중 건설공제조합 보증 건수는 774건, 발주자 직불합의가 체결된 계약은 283건이다. 직불합의 283건이 체결된 하도급 현장은 총 63곳인데 이 중 25%인 최소 16곳은 태영건설이 직접 발주한 자체사업장(4건)이거나 태영건설이 지분을 가진 종속기업 및 계열사가 발주한 사업장(12건)으로 나타났다.
직불합의는 건설 사업장에서 원도급사가 지급정지 및 파산을 해 공사 대금을 하도급사에 지급하지 못할 때 발주자가 직접 대금을 지급하게 하는 일종의 보호장치다. 통상 직불합의를 체결한 하도급업체는 건설공제조합 보증 상품에 중복 가입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발주자도, 원도급사도 태영인 사업장에서 직불합의 계약만 믿고 있는 하도급사는 대금 미납 가능성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이야기다.
선분양이 안 되고, 공사 진행률이 낮은 사업장일수록 부실 위험이 크다. A건설사 관계자는 “통상 80%가 분양되면 전체 공사대금을 커버할 수 있기 때문에 대금을 못 받을 위험은 낮다”면서 “반대로 후분양이거나 분양에 실패한 사업장 중 공정률까지 낮은 경우는 원도급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공사가 중단되거나 연기돼 대금이 유예되고 미납될 위험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태영건설의 경우는 부산항 신항 웅동지구 1종 항만배후단지 개발 사업장 및 대구 신천동 동부정류장 주상복합 사업이 향후 공정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신항 웅동지구 사업장은 이달 15일 기준 공정률이 11.6%, 신천동 사업장은 50%대다. 두 사업장 모두 선분양이 아니다.
신항 웅동지구는 이달 기준 총 982억원(6건) 규모 하도급계약이 체결됐고 이 중 직불합의 계약이 포함됐다. 신천동 역시 직불합의가 체결된 사업장으로 이미 이 단지는 골조공정 대금이 밀려 임금 체불이 발생했다.
태영건설 관계자는 “신항 웅동지구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 “워크아웃 개시 이후 PF대주단이 웅동지구를 포함한 모든 사업장을 검토하는 만큼 추후 관련 절차를 따를 것이고 미지급된 노무비는 설 연휴 전에 최대한 지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경향신문 취재에 “발주자가 태영건설이라도 공동시행사가 있는 경우가 많아 대금 지급이 안 될 위험은 낮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동시행사가 포스코건설인 양산사송과 SK디앤디가 공동시행하는 생각공장 구로 사업장 등을 제외하면 공동시행사가 태영건설보다 훨씬 영세하거나 태영과 지분 등으로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천동 사업장의 시행사 대동개발은 지난해 4월 감사보고서를 보면 당기순손실 243억원을 기록했고, 태영건설이 지분 19.8%를 보유하고 있다. 공동시행사가 별도로 있더라도 대금 위기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법조계에선 설령 태영 외 다른 대형건설사가 발주자라고 하더라도, 하도급사의 대금 지급이 현실적으로 원할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2007년 대법원은 발주자가 원도급사에 줄 대금이 남아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하청업체가 발주자로부터 대금을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다. 건설분쟁 전문 최은영 변호사는 “이미 태영이 발주자에게 공사대금을 받아갔다면, 발주자는 태영에 줄 채권이 없기 때문에 하도급사에 이중변제를 할 의무가 없다”면서 “태영이 받을 기성대금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각종 채권자들의 압류가 들어오면 하도급사 대금이 선순위 채권이 아닌 이상 지급이 안 되거나 밀릴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들을 종합해 볼 때 지난 12월 정부가 태영건설 워크아웃이 하도급사에 미칠 영향을 과소 평가해 발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건설업계는 이미 자체적으로 태영건설 하도급사 부실 위험 분석에 들어가기도 했다.
발주자 직불합의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종광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실장은 “건설산업기본법은 발주처-원도급사-하도급사가 각각 달라야 직불합의를 체결할 수 있지만 하도급법은 원도급사와 발주처가 같아도 직불합의가 가능하다”며 “하도급사를 보호하려는 애초의 법률 의도와 달리 허점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원·김경민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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