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딥페이크의 明과 暗

이용수 논설위원 2024. 1.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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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Godiva)의 로고엔 나체로 말을 탄 여인이 그러져 있다. 고디바 부인이다. 그는 11세기 영국의 지방 영주였던 남편이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자 줄여 주라고 졸랐다가 “당신이 나체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하는 답을 듣는다. 16세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고디바는 결단을 내렸다. 감동한 농민들은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는데 유일하게 커튼을 걷어 고디바를 엿본 게 양복점 직원 톰이었다. ‘엿보는 톰’(peeping Tom)은 관음증의 대명사가 됐다.

▶관음증은 인류 역사와 동행해 왔다. 로마 시대 유흥가에선 매춘부들이 창문을 열어놓고 목욕했다. 원나라에선 매춘부 숙소 벽에 구멍을 뚫어 손님을 끌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에서도 목욕하는 여인들을 엿보는 동자승들의 엉큼한 표정이 압권이다. 관음증 마케팅은 기술의 진보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19세기 음화(淫畵), 20세기 포르노 산업은 카메라, VCR의 등장 덕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관음증을 집단화한 것이 인터넷이다. 1990년대 ‘빨간 마후라’ ‘O양 비디오’ 등은 고전에 속한다.

▶왜곡된 관음증의 한 형태가 음란 사진 합성이다. 초창기엔 유명 연예인, 미스코리아 등의 얼굴을 엉뚱한 사람 알몸과 합성하는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AI에 힘입어 간단한 명령어로 그럴듯한 가짜 이미지·영상을 만든다. 지난 주말엔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음란 이미지가 X(옛 트위터)에서만 4700만회 조회됐다고 한다.

▶지인 능욕이란 범죄가 있다. 유명인이 아니라 지인 얼굴에 보기 민망한 사진을 합성한다.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었다며 돈을 안 보내면 유포하겠다는 협박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음란물만이 아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수갑을 차고 경찰에 연행되는 가짜 사진, 민주당 당원들에게 투표 거부를 독려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가짜 음성이 확산돼 문제가 됐다.

▶딥페이크가 어두운 그림자만 남기는 건 아니다. 작년 한 보험사 광고에 20대 신인 배우 윤여정이 등장해 “아직 작은 배역이지만, 노력하다 보면 사랑받는 배우가 될 수 있겠죠?”라고 말한다. AI가 과거 사진과 영상을 모아 만든 딥페이크 영상이다. 작년 국방홍보원은 2007년 훈련 도중 순직한 공군 박인철 소령을 복원해 어머니와 재회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고인이 남긴 음성·영상·사진으로 부활하는 시대다. 먼저 떠난 가족들과 가상 상봉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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