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日증권사 신입 `기므상`서 증시 전문가로…"닛케이 4만이요?"
친오빠 일본인 친구에 호기심 생겨
와세다대 금융공학 석사·MBA 따
日증권사서 2등으로 영업실습 마쳐
현재는 NH증권서 日기업 분석 담당
"일본 증시를 두고 보라. 최소 1년이면 무조건 '플러스'가 된다."
일년 묵은 호언장담. 국내 증권가에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김채윤(34·사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의 말은 적중했다. 일본 증시는 1990년대 초 버블 경제 붕괴 직전 수준까지 오르며 약 34년 만에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올들어 채 한 달도 안되는 기간동안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의 수익률은 7%가 넘는다. 닛케이지수의 역대 최고치는 1989년 12월에 기록한 3만8915. 현 지수와 8.9% 차이다. 사상 최초의 4만포인트 돌파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1년전만 해도 닛케이지수는 2만6000선 수준이었다. 1년동안 무려 30% 이상 뛴 것이다.
김 연구원을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NH투자증권 본사에서 만났다. 밝고 청량한 분위기 속에 일본에서 길러진 듯한 신중한 품성이 느껴졌다. "지난 해엔 매력적인 밸류에이션(가치)에 정부의 증시 부양정책이 맞물리면서 오를 걸 알았고, 올해까지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연초 급등을 했지만 한 차례 더 강세장이 올 것이고, 3만8000엔선까지는 무리 없이 가리라 예상하고 있어요. 그런데 닛케이 4만이요? 글쎄요. 그 건 잘 모르겠어요."
일본 증시 사상 첫 닛케이 4만을 언제쯤으로 예상하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러워했지만, 일본 증시의 주당순이익(EPS), 주당순자산(PBR) 등을 단순 계산해봐도 아직 상승여력은 남았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의 회계 결산은 3월말이라 지난해 연간 실적 자료는 5월 초 '골든위크' 휴장 이후부터 6월까지 나올 예정입니다. 지금까지의 강세장은 작년의 호실적이 선반영된 것이라면, 이 시기엔 개선된 실적이 실제로 드러나면서 시장의 강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본은 계절성을 타는 시장이라 7~9월까지 여름에 조금 조정이 올 것 같아요."
증시 호황이 이어지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것이라는 낙관적 믿음은 나날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도돌이표'가 찍힌 악보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임기 당시에도 일본 자본시장은 한 때 뜨거웠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끝난다'고 모두가 들썩였었다.
"저는 이번엔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본의 전국 소비자물가지수(CPI)가 2% 수준으로 1년 반 정도 유지되고 있어요. '아베노믹스'의 효과가 지난 2021년 집권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 전략과 함께 증폭된 것이라고 봅니다."
일본은 오랜 디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 하락)의 악순환에서 막 벗어나는 중이고, 미·중 무역갈등 중에서 존재감은 커졌다. 춘투(연초 일본 노동조합이 벌이는 공동 임금인상 투쟁) 당시 자기자본비율이 70~80%에 달하는 부자 회사가 많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엔화 약세(엔·달러 환율 상승)도 일본 수출 기업들의 실적을 개선시켰고 증시를 지원했다. "엔화 가치는 결국 강세로 갈 것이고, 미·일 금리차는 축소되면서 정상화가 되겠지요. 하지만 지난해 임명된 일본은행(BoJ) 우에다 가즈오 총재의 임기는 5년이에요. 그는 '금융완화 정책을 임기 내 마무리 짓겠다'고 했지만 속도는 천천히 진행할 것이고, 우에다 임기 말 혹은 임기가 끝나고 나서야 '금리 인상'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연구원은 "시장 금리가 올라도 기업 실적이 좋고 증시가 호황인 때가 있는데, 바로 경기 확장기"라면서 "일본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분석했다. 대부분의 선진국 증시들이 경기가 다소 위축되더라도 금리 인하가 오기를 바라보고 있는 '배드 이즈 굿(Bad is good)'의 시장인데 반해 일본은 '굿 이즈 굿(Good is good)'의 교과서적인 강세장이라니 살짝 배가 아파진다.
우리도 일본의 방법을 따라갈 수는 없을까. 일본 도쿄증권거래소(TSE)는 시장 개선의 일환으로 PBR이 1배를 밑도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PBR 수준을 높일 것을 압박하고 있다. 우리 증시의 경우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5위인 현대차마저도 PBR이 1배에 못미친다. 일본 당국의 기준으로는 개선이 시급한 상장사다.
"일본 당국은 저(低)PBR 상장사들에게 '자기자본이익률(ROE)을 8% 수준으로 만들어라', '자본 활용 높여라', '주주환원 키워라' 하면서 적극적인 주주환원정책을 독려했고, 회사들에 경영개선방안 공개를 강력히 요청했어요. 일본 증시는 오래된 선진시장으로 주요 참여자가 유럽이나 미국의 투자연금이에요. 그래서 이런 방법이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하지만 한국 증시는 개인 투자자 주도 시장이라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에요. 효과를 보려면 일본처럼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어야 할텐데 반발도 더 클 것 같아요."
창원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다는데, 그 배경이 궁금했다. "고등학교 때 친오빠가 자매결연한 일본 학교에 갔다가 방학 때 일본인 친구를 집에 데려온 거에요.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오빠와 같은 방법으로 오사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를 배웠어요. 그러다 거기에서 대학까지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교토의 명문 사립 리쓰메이칸대학에 진학해 국제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일본 상사들에 입사 지원서를 썼지만 죄 낙방했단다. 기대하지도 않은 증권사 몇 곳에서 연락이 왔다.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에 입사를 했다.
"지금은 '직장내 괴롭힘'이라면서 없어진 제도인데, 당시만 해도 증권사 신입사원들은 입사 첫 해에 모두 영업에 나서야 했어요. 명함만 파서 부자 동네에 국채 10년물짜리를 팔러 다니는 거에요. 몇 계좌를 개설했냐를 매달 공개하고, 그 성과가 인사에도 영향을 줘요. 처음엔 다들 열심히 하는 듯 하지만 영업이 힘드니까 동기들은 노래방에 가서 시간 때우기도 하고 '땡땡이'를 치더라고요. 그렇게 많던 증권사 직원들이 일순간 사라진 때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제가 기특했나 봐요. 어느 날은 일본인 할아버지 한 분이 계좌를 터주면서 이웃에 소개도 시켜주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명함에 적힌 제 성 '기므(KIM)가 눈에 띄셨대요.(웃음)'
여학생 티를 갓 벗은 외노자 '기므 상'. 영업 실습이 끝났을때 그녀의 성적은 신입사원 중 2등. 원하는 부서는 어디든 지원할 수 있다고 해서 미국 지사에 가겠다고 했다. 뉴욕에 있던 지사에서 리서치 보조인 RA(Research Assistant)로 있었고, 이후 도쿄에 돌아와 프라이빗뱅커(PB)와 리서치 매크로 업무 등을 했다. 동해도쿄증권으로 이직해 프랍 트레이딩(파생 상품 거래) 업무를 하며 10여년의 금융사 생활을 이어갔다. 그 사이 회사에서 지원을 받아 와세다대학 금융공학 석사와 경영전문석사(MBA)를 마쳤다.
코로나가 길어지자 한국 집 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에서 충전의 시간을 갖고 유진투자증권에 입사해 일본 관련 금융 상품 만드는 일을 하다가 NH투자증권에 입사를 했다. 현재는 리서치본부 기업분석부에서 일본 기업들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 증시에 투자하는 국내 개미들을 위해 추천 종목을 물어봤다. 국내 투자자들은 100주 단위인 일본 증시 거래의 편의성을 위해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통해 상사, 반도체, 미국채들을 사모으고 있다. "사실 일본 증시에 상장한 미국채 상품을 추천하진 않아요. 수익률보다 수수료가 더 많으니까. 올해는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계속 좋을 것 같고, 호텔·건축·철도·물류 등을 주목해 보라고 하고 싶어요. 팬데믹 이후 상대적으로 포스트 코로나 효과가 늦게 재개가 되고 있어서에요." 일본 증시의 나홀로 호황은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 증시 전문가가 된 성실한 한국인 신입사원 '기므 상'의 이야기를 들을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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