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가해자가 된 홀로코스트 피해자

손제민 기자 2024. 1. 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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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虐殺)은 ‘호랑이가 물어뜯듯이 가혹하게 죽이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도살(屠殺·참혹하게 마구 죽임), 잔살(殘殺·잔인하게 죽임) 등 비슷한 한자어들과 함께 죽이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구 사회에서는 대학살(massacre), 집단학살(genocide),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 집단학살(holocaust) 등 학살과 관련해 다양한 어휘가 발달해 있다. 주로 규모가 강조되는 것 같다. 그것은 상대의 씨를 말려버릴 듯한 기세로 대규모로 죽였던 역사와 관계있을 것이다.

이른바 ‘문명화 과정’ 이후, 학살 대상은 인종적 소수자, 동식물, 자연환경 등으로 옮겨갔지만 근본적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미국 건국 이면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이 있었고, 미국의 세계 제패 과정에 필리핀에서의 학살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말 독일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은 그 정점이었다. 이대론 안 된다는 공감대 속에 1948년 유엔 집단학살 범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만들어졌다. 그 뒤로 국가가 주도한 집단학살은 냉전의 변방에서 일어났다. 1947~1954년 제주도, 1965~1966년 인도네시아, 1975~1979년 캄보디아, 1994년 르완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떨까. 하마스의 10월7일 이스라엘 공격 이후 이스라엘의 반격 속에 110여일 만에 가자에서 약 2만6000명이 숨지고, 20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떠도는 신세가 됐다.

‘세계법원’ 격인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지난 2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집단학살 방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잠정 판단을 내놨다. 이스라엘의 행위가 집단학살에 해당하는지는 결론내리지 않았지만, 향후 그렇게 판단할 여지를 남겼다. 이스라엘 정부는 ICJ가 즉각 전쟁 중단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이 겪은 박해로 인해 만들어진 바로 그 국제법에 따라 이스라엘 국가가 처음 국제법정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지난 수십년간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해온 방식이 느리게 진행된 인종청소에 가깝다는 지적을 새겨야 한다.

이스라엘 시민들이 지난 27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격을 즉각 멈추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26,000’은 이스라엘군이 지난해 10월7일 이후 가자지구에서 죽인 팔레스타인인들 숫자다. EPA 연합뉴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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