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말하는 권력, 듣는 권력

신헌철 기자(shin.hunchul@mk.co.kr) 2024. 1. 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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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대통령 당선된 지 700일
특유의 '비르투' 효과 못 봐
주변에 용기 있는 사람 적어
레드팀 두고 위기관리해야

조선의 '상소왕'으로는 선조 때 사람 조헌이 꼽힌다. 29세에 첫 상소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고쳐야 할 폐단부터 붕당의 시시비비까지 평생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몇 해 전에는 도끼를 들고 대궐 문 앞에 엎드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까지 했다. 이 일로 함경도까지 유배를 갔으나 거기서도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그의 상소를 외면했지만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의를 다했다. 조헌보다 약 80년을 앞서 산 피렌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있다. 피렌체의 권력자 로렌초 메디치는 그가 헌정한 '군주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번민했던 희대의 사상가는 초라하게 삶을 마쳤다.

21세기에 500년 전 이야기를 꺼내자니 씁쓸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나라가 군주 같은 리더를 때로 원하고, 때로 피해가지 못한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지금도 전쟁 중이고, 도널드 트럼프는 세계의 대통령으로 복귀를 꿈꾼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지 곧 700일이 된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지난주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31%, 부정 평가는 63%였다. 부정 평가의 첫째 이유는 경제이고, 둘째는 소통 미흡, 셋째가 김건희 여사 문제다.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한 번 더 빌리자면 국민들은 윤 대통령에게 '포르투나(fortuna·운명)'를 극복하는 '비르투(virtu·역량)'를 기대했다.

강한 남성성과 추진력으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성 정치에 빚이 없는 첫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복기해보면 권력 사용에는 서툴렀고, 직언은 멀리한 듯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정적을 다루는 방식은 두려움을 주었는지 몰라도 미움도 샀다. 인사 방식이나 민간 분야와 관계에서도 미시적 폭력성이 묻어났다.

시계열로 보면 이준석 축출, 이태원 참사, 채수근 상병 사망, 잼버리 부실 개최, 홍범도 흉상 논란, 김건희 여사 명품백 몰카,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등 일련의 사건에서 중도층 지지율을 잃었다. 용산과 정부 내에 레드팀을 두었다면 수습할 기회는 있었다. 취약점을 발견하는 내부의 반대자가 필요했다.

예전 어느 중진 의원은 마주칠 때마다 "요즘 우리가 뭐를 잘못하고 있어?"라고 물었다. 요즘 여당과 용산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윤 대통령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는 말이 용산 대통령실 벽을 넘어 들려온다. 참모들과 대화할 때도 대부분의 시간을 점유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윤 대통령이 야구와 드라마 이야기를 한참 하는데도 끼어드는 사람을 못 봤다고 한다. 기여 지분이 말할 용기와 정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필마단기로 대권을 거머쥔 윤 대통령 주변에는 그런 용기를 지닌 동지가 적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의 해프닝도 그렇다. 이제 한동훈은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라 여당의 리더가 됐다. 용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비서실장을 보내 사퇴를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국민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 눈을 맞으며 허리를 90도 숙인 한 위원장을 보며 윤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은 저서에서 "어른들의 축이 무너지자 백악관은 예스맨으로 가득 찼다"고 한탄했다. 용산도 '예스'에 익숙한 관료들과 정치 지망생들이 모여 대통령 눈치만 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방 안에 홀로 있다면 권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용할 수 없다. 방 안에 현금을 잔뜩 쌓아놓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처지와 같다.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외부와의 관계를 늘려야 한다.

윤 대통령 임기는 40개월이나 남았다. 특유의 비르투를 발휘할 기회는 충분히 있다. 텔레그램 상소를 청하시라. 레드팀을 만들고, 말하는 시간을 나눠주시라.

[신헌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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