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 날 세워온 이스라엘, 유엔 구호기구 ‘하마스 연루 의혹’ 제기
UNRWA “의혹 연루 직원 12명 해고, 조사 착수”
미국 등 서방 국가들, ‘지원 중단’ 잇따라 선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을 놓고 유엔과 번번이 대립각을 세워온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구호 활동을 벌여온 유엔 산하 기구가 하마스와 연계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테러 연루 의혹을 제기하며 유엔 구호기구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했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지원 중단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기습 공격 후 3개월 넘게 흐른 현 시점에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한 것을 두고 가자지구 내 집단학살을 방지하라는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을 무마하기 위한 ‘여론전’이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연계됐다고 지목한 유엔 구호기구는 1949년 설립된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교육, 의료, 주거 등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해 설립돼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서 난민 구호활동을 벌여왔다.
UNRWA는 3개월 넘게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와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기구다. 현재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UNRWA 직원 1만3000여명 가운데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인으로, 이번 전쟁 도중 152명의 직원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아 순직했다.
27일(현지시간) CNN 등 보도에 따르면 전날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UNRWA 직원들이 연루돼 있다고 주장한 뒤 미국을 시작으로 호주, 캐나다, 이탈리아, 영국, 핀란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 서방 국가들이 UNRWA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전날 이스라엘 당국은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UNRWA 직원 12명의 명단을 유엔과 미국에 공유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이들의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필립 라자리니 UNRWA 집행위원장은 이스라엘로부터 해당 의혹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며 “이 직원들을 즉시 해고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해당 직원들이 형사 처벌 등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 중단 발표에 대해 “일부 직원의 혐의 때문에 전쟁 상황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전체 조직을 제재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며 “우리는 매년 이스라엘은 물론 후원국들과 전체 직원 목록을 공유해왔고, 이제까지 특정 직원에 대한 어떤 우려도 제기된 바 없다”고 밝혔다.
UNRWA는 이번 전쟁 이전부터 이스라엘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스라엘은 UNRWA가 가자지구에서 ‘반이스라엘 선동’을 한다고 비판해 왔고, 2017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UNRWA가 유엔난민기구와 통합해야 한다며 이 조직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최근 UNRWA가 남부도시 칸유니스에서 운영해온 피란민 대피 시설을 탱크로 공격해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기도 했다. 미국이 이 공격에 대해 비판하자 이스라엘군은 공격 사실을 부인하며 하마스 소행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 이후 하마스가 UNRWA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며 여론전에 나섰다.
논란이 커지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7일 입장문을 내고 “테러 행위에 연루된 모든 유엔 직원에게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회원국들이 지원을 계속해줄 것을 호소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이 테러에 연루됐다고 지목한 직원 12명 가운데 9명이 해고됐고, 1명은 사망했으며 나머지 2명은 신원을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회원국들의 우려를 이해하고, 나 역시 충격을 받았다”면서 “의혹이 제기된 직원들의 혐오스러운 행동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UNRWA에서 일하는 수만명,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인도주의 업무를 하는 다수를 징벌해선 안 된다”면서 “절박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 발발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한 유엔 총회 결의안을 모두 무시하는 등 유엔과 지속적으로 날을 세워 왔다.
이번 전쟁 발발 뒤 양측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지난해 10월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56년간 숨 막히는 점령에 시달려왔다”고 언급하자, 이스라엘은 자국 내 유엔 대표부 직원의 비자를 취소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해 말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휴전 결의안을 압박하기 위해 유엔 헌장 99조를 발동하자, 이스라엘은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스라엘의 의혹 제기는 유엔 최고 법원인 ICJ가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를 방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판결한 날 나왔다. 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의 마이라브 존스제인은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가자지구에서 UNRWA 활동을 문제삼아 왔다”면서 “제기된 의혹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하필 이 시점에 이스라엘이 해당 의혹을 제기한 것은 ICJ 집단학살 방지 판결을 물타기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서방 국가들의 지원 중단이 가뜩이나 위기 상황에 놓인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팔레스타인 변호사인 요한 수피는 “몇몇 직원들의 문제로 인해 전체를 제재하는 것은 가자지구 주민들을 집단 처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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