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일부 인정했지만…양승태 아닌 참모들 책임만 물은 법원

이재호 기자 2024. 1. 2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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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지난 26일 1심 법원은 ‘사법농단’의 정점에 서 있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47개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지만, 사법농단 자체가 없었다고 판단한 건 아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재판장 이종민)는 공소사실별로 ①직무 권한이 있는지 ②직권을 행사했는지 ③행사가 남용인지 ④공모했는지 순서로 유죄 여부를 따졌는데, 직권남용이 인정되더라도 마지막 단계인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봤다.

특히 법원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탈퇴를 종용하고, 통합진보당 관련 일부 사건에서 재판 개입을 시도한 정황 등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를 주도적으로 처리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임 전 차장 역시 직권남용 등 30여개의 혐의로 기소돼 다음달 5일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28일 한겨레가 1심 재판부의 선고와 설명자료를 분석해보니, 법원은 △비판세력 탄압 △헌법재판소 상대 위상 강화 시도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 등 크게 세 부분에 대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법원은 2015년 3월 임종헌 전 차장이 법원 집행부에 비판적이었던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연구회 내부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활동을 위축시킬 방안이 담긴 보고서를 작성하고, 법관들을 탈퇴하게 한 것은 법관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법하고 직권남용이 맞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인사모 관련 대응방안 검토’ 보고서 등의 작성을 지시한 것은 법관의 표현·연구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 지시로 직권남용이 맞다”고 했다.

이런 재판부 판단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를 와해시키려 한 혐의로 2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선고받은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나아가 이 전 실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연구회 등 와해를 위한 보고서 작성 지시에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이 공모했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양 전 대법원장은 공모하지 않았다’는 이번 1심 재판부 판단과 달라 항소심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남아 있다.

2016년 3월 임 전 차장이 문성호 전 사법정책심의관에게 박한철 전 헌재 소장의 발언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박한철 헌재 소장, 거침없는 발언에 법조계 술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대신 작성해 법률신문에 보도한 것도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문 전 심의관이 거부 의사를 표현했음에도 초안을 작성하도록 한 것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밖에도 임 전 차장이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함께 헌재 재판관과 연구관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것도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이민걸 전 실장과 함께 재판에 넘겨져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태다. 이민걸·이규진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에 이어 양 전 대법원장의 1심 재판부까지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을 인정하면서 임 전 차장은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또 법원은 임 전 차장과 이 전 상임위원이 서기호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재임용 탈락결정 취소 소송’을 맡은 서울행정법원 판사에게 법원 행정처 입장을 전달하려 한 것도 직권남용으로 판단했다. 통진당 해산 결정 뒤 국회의원직을 잃은 이현숙 전 전북도의원이 법원의 판단을 다시 따져보겠다며 낸 ‘퇴직 처분 취소 소송’과 관련해, 이 전 상임위원이 재판부에 자료를 전달하려 한 것 역시 직권남용으로 인정했다.

위법 행위는 있었지만 공모의 증거가 부족해 양 전 대법원장은 무죄라는 법원 판단에, 법원 안팎에선 양 전 대법원장의 권한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해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나왔다. 사법농단이 촉발하는 내부고발을 했던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겨레에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이 있었다고 판단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공모를 하지 않았다면 법원행정처는 누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수도권의 한 고등법원 판사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등의 큰일이 대법원장의 지시 없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며 “법원행정처 의사결정 책임자가 대법원장이 아니라면, 앞으로 법관들은 (행정처의) 지시나 결정을 따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1심 재판에만 1810일(4년11개월20일)이 걸렸던 양 전 원장 사법농단 판결문은 2천쪽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중앙지법은 비실명화 작업을 거친 뒤 공유할 예정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정혜민 기자 jh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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