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잿더미 앞에서
김남주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시는 ‘잿더미’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의 명징함과 달리 이 시는 상당한 모호함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작품의 구도나 리듬, 상징은 김남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꽃과 피, 영혼과 육신, 황혼과 새벽, 봄과 겨울 같은 이미지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꽃과 피, 영혼과 육신이 서로 맞물리고 스미면서 “그것”으로 합쳐진다. 아마도 김남주는 이항대립의 긴장 자체가 새로운 시간의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신념과 의지가 평생 김남주의 시를 지탱해준 힘이었던 건 맞지만, 그것도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 ‘세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현실은 카오스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잿더미’는 유신 치하에서 젊은 김남주가 모색하던 길의 희미한 입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꽃과 피는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적여 찾아낸 꺼질 수 없는 불씨였는지도.
잿더미가 숨 막히는 현실을 가리키는 시적 은유 내지는 상징으로 가능한 때는, 그러니까 시의 은유가 가능한 때는 사물과 인간의 정신이 그나마 살아 있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잿더미가 은유가 아니라 실재인 세상에서는 사람의 말도 양심도 정신도 잿더미인 게 분명해 보인다. 얼마 전에 우리는 실제로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지난 22일 오후 11시가 넘은 시각, 충남 서천특화시장에 화재가 나서 시장 전체가 모두 타고 말았다. 서천특화시장은 싱싱한 수산물로 알려질 만큼 알려진 곳인데, 그곳이 한밤중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다. 이 화재로 상인들의 심정이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우리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공감(共感)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상투적으로 쓰지만 공감은 감정의 문제이기 전에 감각의 문제다. 함께 경험하는 사건에 대한 감각도 각자 다른 마당에, 멀리서 들리는 소식으로는 당사자들과 같은 감정을 갖기 어려운 법이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각자가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감각을 자신도 모르게 되살리게 된다. 이는 아마도 ‘살아 있음’의 생생한 증표이기도 할 테고, 이 증표를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한 개별자가 아니라 ‘공동 존재’임을 확인하기도 한다.
상인은 뒷전, ‘궁중암투’만 조명
그런데 화재 다음날인 23일 문제의 장면이 벌어졌다. 갈등 중인 것으로 알려진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잿더미가 된 서천특화시장을 배경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준 것이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대다수 언론이 상인들의 절망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추한 ‘궁중 암투’의 모습을 생생하게 중계했다는 점이다. 거기다 대통령은 상인들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고 휑하니 돌아가 버렸다. 이에 대한 항의가 있자 대통령실이 내놓은 변명이 가관이다. 23일 오후 1시30분에 도착해서 20분 뒤인 1시50분에 기차로 떠났으면서 언제 상인 대표의 목소리를 듣고 제반 상황을 보고받았단 말인가? 이게 가능하기는 한가? 이제는 이런 거짓말에 대한 질타도 실망도 반성도 없다. 하기야 대통령이나 여당 비대위원장이 오죽 바쁜 자리인가? 불법적인 선거운동 하랴, 남 탓하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랴, 참으로 바쁜 일정을 살고 있으니 일단 그럴 수 있다고 해두자.
하지만 상인들이 비통에 빠져 있는 잿더미 앞에서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이 보여준 ‘아름다운’ 화해 장면은 참으로 모욕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상인들이 대통령에게 불구경 왔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 아닌가? 대저 힘 있는 자들이란, 언제나 민중의 고통과 비탄 앞에서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못된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 화해 장면은 민중의 고통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며 무감각, 무사유다. 도저한 ‘반지성’이다. 저들의 권력과 재물이 민중의 고통을 발판 삼아 이루어진 것이니 잿더미 앞에서 보여준 모습이 자신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언론은 펑펑 내리는 눈발 속의 대한민국 최고 서열 1, 2위의 모습만 내내 보여줬다. 잿더미는 이제 너무도 흔해빠졌다는 듯이 말이다.
그들의 화해 장면은 ‘민중 조롱’
‘잿더미’를 쓰고 난 한참 뒤에 김남주는 다음과 같은 짧은 시 한 편을 남겼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종과 주인’). 이로써 젊은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져 찾아낸 불씨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드러났다. 아니 오히려 잿더미를 뭉쳐 “주인의 목을” 벨 ‘낫’을 만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동시에 지금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낫’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 불을 지른 자는 누구인가? 타는 불에 자기 탐욕으로 기름을 부은 자는 누구인가? 그 범인이 어디 한둘이겠는가마는, 범인은 반드시 현장을 다시 찾는다는 말도 있더라!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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