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 주고 세끼 식사까지 무료…10년간 작가 102명 머물러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1. 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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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위 ‘소설가의 방’ 10주년
4~6주간 명동 프린스호텔서
작업공간·숙식 등 전폭 지원
김초엽·장강명·김호연 등 혜택
소설계 베스트셀러 산실 역할
서울프린스호텔 후원으로 마련된 문학창작집필실 ‘소설가의 방’ 객실 한편의 작업 공간. 지난 2014년부터 약 10년간 신진 작가 101명이 입주해 작품을 집필했다. [사진 출처=서울프린스호텔]
소설가들에게 집필 공간은 특별하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홀로 부엌에 앉아 쓴 소설을 ‘키친테이블 노블’이라고 부를 정도다. 유명 작가들이야 자기만의 작업실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작가 지망생이나 이제 막 등단한 신진 작가들의 사정은 다르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학생일 수도 있고, 아이를 키우며 일상에 치여 사는 주부일 수도 있다. 이들에게는 온전히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신진 작가들에게 3성급 호텔의 숙식과 집필 공간을 제공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소설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호텔 프린스 소설가의 방(문학창작집필실)’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서울 명동에 소재한 서울프린스호텔의 후원으로 2014년부터 매년 5~14명의 신진 작가가 소설가의 방에 입주해 작품을 썼다. 이달 입주한 작가 3명을 포함해 지난 10년간 이곳을 거쳐간 작가 수는 102명에 달한다. 그동안 소설가들의 든든한 동반자로 다양한 문학 작품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소설가의 방 입주 작가에게는 4~6주간 17㎡(5평) 안팎의 객실과 세 끼 식사와 음료가 제공된다. 호텔 내 카페, 프라이빗룸, 로비, 라운지 등에서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 이를 위해 호텔 측은 지난 10년 간 누적 약 2억2000만원 상당의 현물을 기부했다.

서울 프린스호텔의 후원으로 마련된 문학창작집필실 ‘소설가의 방’ 객실 문에 안내 문구가 적혀 있다. [사진 출처=서울프린스호텔]
입주 작가 대부분은 등단 후 5년 안팎의 젊은 작가들이다. 일례로 SF소설계 신예로 꼽히는 김초엽 작가는 지난 2019년 출간된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후반부 작업을 이곳에서 했다. 또 국내에서만 누적 판매 150만부(1·2편 통합)를 달성해 최근 대학로 연극으로도 제작된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으로 이름을 알린 김호연 작가도 지난 2015년 소설가의 방에서 집필 활동을 했다. 장강명 작가가 가장 최근에 낸 소설집 ‘당신이 보고싶어하는 세상’ 역시 소설가의 방을 거친 작품이다.

소설가의 방은 소설가 윤고은 작가가 한 격주간지에 기고했던 짧은 칼럼에서 시작됐다. 신춘문예를 준비하기 위해 같이 스터디하던 사람들과 선배들의 합숙 훈련법을 모방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호텔에 묵었던 12월 어느 날의 추억에 관한 글이었다. 여기에 등장한 호텔이 바로 서울프린스호텔이다. 우연히 치과에서 이를 읽은 프린스호텔 직원이 사내에 알렸고, 이후 호텔 측과 윤 작가가 연락이 닿으면서 일사천리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초창기 잠깐은 호텔 측에서 작가들 알음알음으로 입주 작가를 모집했지만, 이후 문예위가 지원사업을 맡아 공모 형태로 운영해 왔다.

서울프린스호텔은 관광업계 전반이 경영난을 겪었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호텔이 문을 여는 한 소설가의 방 운영을 멈추지 않았다. 2021년에는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소설가의 방 전용 객실(606호)를 만들고, 입주 작가들의 소설책 표지를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었다. 정은우 작가(2022년 입주)는 “혼자 있는 공간이지만 ‘다른 소설가들이 다녀갔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장 위안이 됐던 공간”이라고 말했다. 채기성 작가(2022년 입주)도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또 다른 발자취가 되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프린스호텔이 제공한 문학창작집필실 ‘소설가의 방’에 입주해 작업했던 소설가 김호연 작가가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출간한 뒤 책과 함께 호텔 측에 전달한 감사 메시지. 프린스호텔을 ‘소설가의 찐 친구’라고 적었다. [송경은 기자]
이처럼 소설가의 방을 통해 같은 공간, 서로 다른 시간을 공유했던 소설가들은 지난 2017년 함께 소설집 ‘호텔 프린스’를 출간하기도 했다. 2014~2015년 사이 이곳에 각자 입주했던 안보윤·서진·전석순·김경희·김혜나·이은선·황현진·정지향 작가 등 8명이 호텔을 모티브로 쓴 단편소설들을 엮은 책이다. 문예위와 서울프린스호텔은 2019년 작가와 독자가 만날 수 있는 북 콘서트를 열었고, 2022년에는 ‘소설가의 방 홈커밍 데이’도 개최해 입주 작가 3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경험을 나눴다.

박서련 작가(2019년 입주)는 “놀라울 만큼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원래 없던 300매 원고가 생겼다”며 “프로그램이 오래도록 존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설가의 방에서 단편소설 ‘몰려오는 것들’과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집필한 정선임 작가(2022년 입주)는 “오래 전부터 꿈꾸던 장소였고 꿈을 이룬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소설가의 방 입주 작가는 상·하반기 각각 6명씩 선발된다. 특히 올해부터는 선발 기준의 문턱을 더 낮췄다. 그동안은 ‘등단 후 10년 이내’가 기본 조건이었지만 아직 등단하지 못한 작가들도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첫 작품 발표 후 5년 이내’로 완화했다. 남보람 서울호텔프린스 대표는 “소설가의 방에 오시는 작가님들께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계속 찾아나갈 계획”이라며 “올해는 10주년을 맞아 작품 홍보나 호텔 혜택을 제공하는 멤버십 등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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