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의 지명은 이름 그대로 ‘누에를 기르는 방’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 세종은 양잠을 장려하며 한양 내에 세 곳의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를 두었는데, 서잠실(연희동), 동잠실(잠실), 신잠실(잠원동)이 이에 해당했습니다. 조선야사전집을 보면 ‘동잠실과 서잠실에서 각각 고치에서 실을 뽑아 승정원에 바치면 공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한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잠실은 본래 강북에 위치했고, 한때는 섬이었다가 강남으로 정착한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 살곶이벌 일대(광진구 자양동)에 붙은 육지였던 잠실은 행정이나 생활권 측면에서도 한강 이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지역이었습니다.
한강 상류에 댐이나 보처럼 물을 막고 수위를 조절하는 시설이 전무했던 과거에는 큰 비가 올 때마다 강이 범람했는데, 홍수가 심할 때에는 물길이 바뀌는 일도 있었습니다. 조선 중종 15년인 1520년에 한강 유역에 대홍수가 있었습니다. 이 홍수로 잠실 북쪽에도 강물이 흐르게 되어 반도였던 잠실은 뭍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때 생긴 작은 천을 신천으로, 남쪽의 한강 본류를 송파강으로 불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천은 지금의 여의도 샛강보다도 수류가 적은 건천에 가까웠습니다.
섬이 된 잠실에는 두 동리가 있었습니다. 섬의 북안은 신천리, 남안은 잠실리로 불렸는데 이 지명은 지금에 이어져 신천동과 잠실동이 되었습니다. 잠실섬은 누에를 치는 양잠소답게 섬 곳곳에 뽕나무가 가득했습니다. 김정호가 제작한 한양 지도인 <경조오부도>를 보면 잠실섬 옆에 뽕나무숲을 의미하는 ‘桑林’이라는 표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잠실은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침수지였기에, 조선 후기로 올수록 이곳의 잠업은 쇠퇴하였고 신잠실이 양잠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조선 후기 동잠실에는 ‘잠실’이라는 이름만이 남았고, 오랜 양잠의 맥이 끊기게 됩니다.
강의 흐름을 바꿔놓은 대홍수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한강에는 한 해에 네 차례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세 개의 태풍은 한반도 전 지역을 강타했고, 연일 계속된 집중호우로 한강과 낙동강 일대 피해는 유독 컸습니다. 논밭 10만여 단보, 가옥 6000호가 유실되었고 붕괴된 가옥은 1만 7000여 호, 침수된 가옥은 4만 6000호여 호에 달했으며 64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기록적인 수해로 이때의 홍수는 ‘을축년 대홍수’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옵니다.
을축년 대홍수는 잠실 옆을 흐르는 한강의 유로를 바꿔놓았습니다. 홍수 이후 신천으로의 유량 유입이 급격하게 늘어나 본류가 되었고, 반대로 기존의 본류였던 송파강은 지류가 되었습니다. 유량이 풍부한 송파강을 끼고 전국의 물산이 집결하며 번성했던 송파나루터와 송파시장은 대홍수 이후 쇠퇴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1934년 일제강점기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조사서에 따르면 잠실섬 내 신천리, 잠실리에는 각각 62가구 384명, 35가구 201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뽕나무가 사라진 지 오래인 척박한 섬에서 주민들은 밀이나 수수, 메밀 따위를 경작했습니다. 1960년대까지 서울의 동쪽 끝은 뚝섬과 광나루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강 동쪽의 거대한 모래섬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1965년의 언론에서 잠실섬을 ‘서울의 외딴 낙도’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잠실 미개발의 역사는 이때까지도 이어져 온 모양입니다. 1963년 잠실 일대는 서울로 편입되었지만, 잠실섬은 문명에서 외면당한 섬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뱃사공 일을 하거나 도시에 내다 팔 채소를 재배하며 살았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섬에는 TV, 전화는 물론 전깃불도 없었고, 동사무소와 파출소 같은 행정시설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민들이 잠실을 인지하는 사건이 매년 한 번씩 있었는데, 여름철 홍수 때였습니다. 매해 여름철 집중호우가 내리면 잠실은 물에 잠겨 신문에 이름을 올리기 일쑤였습니다. 1966년 7월 한강이 불어나 섬이 고립되었을 때, 미군이 선박과 헬기를 동원해 섬 주민 1,400여명을 구조한 사건이 전해집니다. 섬에 물이 들어차는 위급상황에서도 잠실섬에서는 외부에 구조 요청을 할 만한 통신수단도 없었다고 합니다.
광주대단지 사건과 잠실 개발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한강 개발과 함께 서울 속 오지였던 잠실섬에도 개발의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제1차 한강종합개발의 결과로 1967년 9월 한강대교 남단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첫 제방도로(노들로)가 완공되었습니다. 제방을 쌓자 수면 위로 넓은 신규택지가 드러났고, 서울시는 이를 일반에 매각하며 수익을 발생시켰습니다. 제방공사는 수해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신규택지까지 조성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공사였습니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 경험을 통해 여의도를 포함한 대규모의 한강유역 개발을 준비하는데, 1969년 수립된 여의도 및 한강연안 개발계획에서 처음으로 잠실섬이 육속화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연 여의도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의도가 개발되었고 순차적으로 동부이촌동, 흑석동, 반포동, 압구정동, 구의동까지 한강을 따라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물 위로 드러난 새 택지는 도로와 아파트로 빼곡하게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잠실섬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실과 접한 영동지구의 개발과 광주대단지 사건 등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잠실섬의 개발은 필연적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는 ‘불량건물 정리계획’을 수립하며 도심 내 무허가주택을 정리하고 퇴거의 대가로 대단위 거주지를 조성해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켰습니다. 이 때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 350만평의 대단지가 조성되었고, 12만 명의 이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서울에 두고 있었는데, 광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도, 교통편도 없었습니다. 이주민들은 겨우겨우 천호동까지 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광진교를 건너 시내로 넘어갔습니다. 출퇴근 전쟁에 상하수도와 전기조차 없는 열악한 주거환경에 대한 불만까지 누적되었고, 결국 이것이 터져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합니다. 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서울시와 정부는 부랴부랴 서울과 광주를 잇는 교통망을 정비합니다. 잠실과 강북을 잇는 잠실대교와 잠실에서 광주를 잇는 도로(송파대로)의 건설이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쓰레기까지 끌어온 잠실섬 매립의 대서사시
잠실섬은 330만 6000㎡, 약 100만 평이 넘는 큰 섬이었습니다. 1971년 삽을 뜬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의 큰 틀은 남쪽의 강 흐름을 막아 육지와 연결하고, 북쪽에는 제방을 쌓아 대규모 택지를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실 매립공사는 이권이 막대한 사업인 만큼 서울시가 직접 시행하려고 했지만, 건설부는 민자사업으로 시행할 것을 강제합니다. 대규모 공사의 위험부담을 공동으로 분담하고, 이후 이권도 분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명분이었습니다. 그 결과 공사는 삼부토건,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아건설, 극동건설 다섯 개 토건회사가 공동출자한 잠실개발주식회사가 주체가 되어 사업을 진행됐습니다.
제방공사는 1975년 말 완료되었지만 매립공사는 예정으로부터 3년여가 지체된 1978년에서야 끝났습니다. 한강에서 걷어 올리는 토사가 턱없이 적어 매립공사의 진척이 더뎠기 때문입니다. 두 차례나 설계를 변경했고, 설계가 바뀔 때마다 면적이 축소되었습니다. 잠실개발주식회사는 몽촌토성 언덕을 헐고 그 흙으로 매립공사를 완료할 것을 제안했지만, 서울시는 백제시대 축성된 성터임을 고려해 불허합니다.
서울시가 생각해낸 자구책은 시내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가져다 메우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생활쓰레기 대부분은 연탄재였기에, 저지대 매립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처럼 잠실 매립공사지는 사실상 쓰레기 처리장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 위를 서울시내 공사현장에서 나온 흙으로 덮어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매립 총 면적은 약 250만㎡(75만 3000평)이었고, 그중 36만㎡(10만 9000평)은 제방 및 도로용지로 국유화되었고, 나머지는 사업 주체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참고자료>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
ㅇ「88올림픽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ㅇ「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서울역사박물관
ㅇ 김기호 외 6인, 서울도시계획사 제2권 「광복~1970년대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