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행복 살 수 없다”에 깃든 복종과 감내, 내 탓···‘체제 정당화의 심리학’[책에서 건진 문단]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해 주세요!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401200600001
“당연히 살 수 있죠. 그건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거짓말일 뿐이에요.”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한 에피소드에서 부자 가브리엘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매리 수녀의 말에 이렇게 대꾸합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어”라는 체제 정당화의 심리
미국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사회·정치행동연구소 공동 책임자인 존 T. 조스트는 <체제 정당화의 심리학>(신기원 옮김, 에코리브르) 책 7장에서 이 대화를 인용합니다. 읽기 딱딱한 이 책에서 ‘체제 정당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쉬운 사례 중 하나입니다. 아래 동영상 50초쯤 보시면 해당 대화가 나옵니다.
매리 수녀의 말에 든 “억압받는 집단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빈곤에는 결국 보상이 따른다는 믿음”이나 ‘가난의 낭만화’는 문학 작품, 종교, 대중 매체에선 흔히 나옵니다. <성경>의 그 유명한 말은 “부자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죠. 신년에 조문영(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인터뷰를 냈는데, 가난의 낭만화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너무 길다고 욕도 조금 먹은 인터뷰입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401031716001
이 책 저자는 “가난으로 고통받는, 또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그들만의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클리셰”라고 말합니다. 대중문화의 또 다른 예를 듭니다. 저자는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거나 가난하지만 정직하다는 고정 관념이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며 든 예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이념으로서 텔레비전>에서 심각하게 낮은 임금을 받는 젊은 교사가 산전수전을 겪는 내용의 시트콤을 관찰하고는 한 말입니다.
여주인공은 너무나 명랑하고 지성도 뛰어나서, 그 좋은 특성이 그녀의 험난한 운명에 대한 보상처럼 보인다. 시청자는 그녀와 동일시하도록 고무된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농담이다. 이 시트콤은 독자에게 말한다. 유머 감각 있고, 성품 좋고, 눈치 빠르고, 매력적이면 굶어 죽을 정도의 임금을 받더라도 흥분할 필요 없다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 모습 그대로라고.
노동 계급은 게으르고, 금발 여성은 멍청하며, 흑인은 공격적이다
체제와 지배자들이 ‘가난하지만 행복한’(7장 제목) 같은 ‘고정 관념’이나 여러 종류의 ‘허위의식’을 주입합니다. 자본과 노동 문제에서는 “노동 계급이 게으르고 멍청하다거나 책임감이 없다”, 젠더 문제에선 “금발 여성은 아름답지만 멍청하다”, 인종 문제에선 “흑인은 운동은 잘하지만 공격적이다”가 고정 관념의 예들이죠. 오랜 고정 관념의 다른 예가 있습니다.
다양한 아프리카인을 하나의 인종 집단으로 호명하고 이 집단을 악, 죄, 게으름, 야만성, 섹슈얼리티, 무책임과 연결 지은 것은 백인 노예 소유주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인간을 결박하고, 채찍질하고, 팔아넘기고, 가족을 갈라놓고,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걸 합리화할 수 있게 했다. 한 방울 규칙(one-drop rule: 미국에서,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간주하던 규칙一옮긴이)의 기능은 흑인과 백인 사이의 장벽을 공고히 하고, 흑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백인으로도 구분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혼혈인에게 한 방울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배 집단의 억압을 내면화하는 동시에 인종 지배의 체계를 지지한다는 의미다(p. 15). 사회적 고정 관념은 인류 역사에 걸쳐 많은 경우, 가장 끔찍한 사회 체계와 그 체계에서 정한 관습조차도 정당화하려는 이념적 시도 속에서 무자비하게 남용되어왔다.
젠더 문제에서도 고정 관념은 힘을 발휘하죠.
여성은 상대적으로 무능하지만 따뜻하고, 친근하고,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사회적 역할의 불평등한 분배를 합리화하고, 가부장제 사회의 착취적 본질을 은폐할 수 있다.
허위 의식은 “스스로에 대한 억압을 유지시키는 거짓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허위의식은 “피지배 집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열등하고 불리한 입장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며, 자신이 지배를 당하는 원인에 맞서 행동할 능력이 없다고 믿게끔 함으로써 불평등이나 부정의를 강화”합니다.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는 것, 정치적 고통의 원인을 잘못된 곳에서 찾는 것, 억압하는 사람의 규준을 받아들이는 것” 등이 허위의식의 주입 결과죠.
지배 원인에 맞설 능력이 없다고 믿게끔 하는 체제 정당화
고정 관념과 허위의식의 힘은 강력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64년 동안 유지됐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제가 400년 넘게 남았으며,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3000년 넘게 지금까지 존속합니다.
인종, 민족, 종교, 사회 계급, 젠더, 성적 지향에 기초한 차별 때문이든, 누군가에게 특권을 주고 타인으로 하여금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정책과 제도 때문이든, 심지어 역사의 우연, 유전적 차이, 운명의 변덕 때문이든, 어떤 사회 체제는 특정 이해 당사자의 이익을 다른 사람들의 이익보다 더 잘 보장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경우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사회 계급이나 위치와 상관없이) 그들의 사회·경제·정치 제도의 정당성을 수용하고 방어하며, 세상이 정의롭다는 믿음을 유지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꿀 수 없는 어려운 경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불평등을 감내하고, 심지어 정당화” 하기도 하죠.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극단적 형태의 경제적 불평등을 감수하는데, 이는 그들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은 그 비율에 맞게, 따라서 공정하게 보상받는다는 능력주의 이념의 원리를 수용”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 계급이 그들을 억압하는 사회 질서가 정의롭다고 믿는 경향”을 두고 “이러한 믿음은 주로 혼란, 즉 합리화 같은 정서 관련 기제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정의롭다는 믿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심지어 자신의 불운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탓하게 만든다. 반대로 이러한 욕구는 권력 있고 외모가 매력적인 사람을 포함해 운이 좋았던 사람들은 칭찬하도록 만든다. ……비주류 집단이 스스로 주류 집단 구성원만큼 똑똑하지 않거나,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거나, 자격이 있지 않다고 가정할 때. 그들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사회에 존재하는 지위 및 권력 차이에 정당성을 허락하는 (그리고 강화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정당화’ 할까요? 저자는 예일 대학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합니다. 한국 여러 상황도 떠오릅니다.
왜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느낄까? 왜 사람들은 해로운 관계를 지속할까? 왜 어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이들은 백인 인형이 흑인 인형보다 더 매력적이고 바람직하다고 믿게 될까? 왜 사람들은 부정의(injustice)로 인한 희생자를 비난하고, 부정의로 인한 희생자는 때로 자신을 비난하는 걸까? 왜 사람들이 자신과 서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게 그토록 어려운 걸까? 왜 개인과 사회의 변화는 우리에게 그토록 도전적이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정치경제학의 민감한 질문도 여럿 있다. 왜 가난한 사람을 포함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걸까? 왜 우리는 권력형 정치, 경제 비리를 참고 넘어가는 걸까? 세계적 금융 위기, 경제 붕괴, 은행에 대한 정부의 구제 금융이 이어지고, 미국과 유럽의 정치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심히 우려스러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에 대한 분노는 어디 있는가? 기후 관련 재앙이 점점 더 많은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왜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진정한 진보를 이루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가? 여기에 어떤 공통분모, 이해하기 어려운 이 모든 불평등, 부정의, 착취의 사회적·심리적 발현을 설명하는 테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알고자 한다.
착취 감내, 권위 복종에 관한 끝없는 예시들
새삼스러운 의문은 아닙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16세기 중반, 22세의 프랑스 법학도 에티엔 드 라 보에티가 쓴 ‘자발적 노예에 대한 담론’이라는 제목의 글과도 이어집니다. 드 라 보에티는 “그토록 많은 사람, 많은 마을, 많은 도시, 많은 국가가 그들이 부여한 권력 말고는 다른 권력이 없는, 한 명의 독재자 아래서 고통받는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가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그를 견뎌내길 원한다는 것밖에 없다. 충격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라고 썼죠.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도 “인류 역사에서 저항은 고통에 대한 일시적 반응일 뿐이다. 우리는 저항의 예시보다는 착취에 대한 감내, 권위에 대한 복종에 관해 끝없이 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부정의한 체제를 받아들이고 정당화할까요? 먼저 저자의 이론과 개념 뜻을 잠깐 보겠습니다. 저자의 ‘체제 정당화 이론’은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허위의식’ 개념처럼, 사람들이 사회·경제 체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개인 및 집단 수준의 메커니즘을 설명해보려는 이론”입니다. 책은 “기존의 것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경향”을 분석합니다.
책에서 체제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에 전념한 남아프리카공화국 활동가 스티븐 비코가 내린 정의와 비슷한 뜻입니다. 비코는 체제가 “당신의 존재를 통제하고, 행동을 지시하고, 권위를 행사하는, 제도화되었거나 제도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기능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이 힘은 “비주류 집단이 체제는 자연 질서의 일부이며 세상은 항상 이럴 것이라고 믿게” 하죠.
존경, 감탄, 숭배를 끌어내고, 체제 의존을 느끼게끔 조장하다
체제와 지배자들 문제를 우선 봐야할 듯합니다. 신전과 동상을 만드는 식의 “존경과 감탄” “숭배”를 끌어내는 방법과 함께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 체제 의존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조장합니다. 이렇게 느끼면, 여성은 정치나 일에서 젠더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공정하다고 여기게끔 됩니다. 자기 자신과 불운한 다른 피해자들을 탓하죠. 미국의 라틴계와 아프리카계 사람들도 가난이 사회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약물 및 알코올 남용 등 가난한 사람들의 개인적 단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인간 내면의 경향성도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이념의 동물”인 인간은 ”불이익을 당할 때조차도 몸담고 있는 사회 질서에 맞는 규준을 내면화”합니다. 그람시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 질서”를 “안정적이고, 조화롭게 조절된 체계”로 보려는 보편적 경향을 강조했죠.
‘심리적 이유’도 있습니다.
자신이 부정의 혹은 착취 속에 살고 있다고 자각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은 현실을 왜곡하고 방어하려는 동기가 생긴다. 즉, 상황이 사실상 보기보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합리화 과정은 개인에게 일시적으로 정서적 위안을 준다. 부정 정서는 누그러지고 긍정 정서가 더해지며, 현 상태에 대한 만족도가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리화 과정은 체제를 바꾸기 위한 집단행동에 대한 지지를 낮추기도 한다. 말하자면-불이익을 받는 집단 구성원을 포함해-사회 체제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사람은 그 체제의 정당성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다.
시간이 가면 일종의 “종속의 습관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노예 생활이나 강제 수용소의 진정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생존자들도 “체제에 대한 어떤 적응”을 하게 됩니다.
체제 정당화 여부는 사람들마다 갈리기도 하죠. 저자는 “심리학 연구에서는 복잡한 사고를 적게 하거나, 죽음에 대한 불안이 높거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현실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현존하는 관습과 제도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혔다”고 말합니다.
앞서 인용한 드 라 보에티는 사람들이 강압이 없을 때도 지배를 견디고, 심지어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종의 정치학’을 두고 ‘문화적 타성’ ‘관습과 습관의 힘’ ‘생산된 합의(즉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 ‘후원’ 등을 꼽았습니다. 이 ‘후원’은 “독재자가 주변에 추종자를 거느리고, 그들은 다시 자신의 추종자를 거느리는 것”을 뜻합니다.
‘진통제’ 역할 하는 체제 정당화
체제 정당화는 ‘진통제’ 역할도 하죠. 저자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적 신념이 사람들을 달래고 누그러뜨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종교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하고, 더 보수적이고, 사회·경제 체제의 적법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재 삶의 상황이 더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체제 정당화의 정서적 이점은 가능한 사회 변화 및 불평등 완화의 가능성을 줄이는 대가와 함께 온다.
저자는 종교적 신념 체계가 사회 지위·권력·특권·부를 기초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들이고 유지하게끔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한 예로 힌두교의 개념인 카르마(업보) 영혼의 환생이라는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의 현재 지위가 그들에게 걸맞고, 종교의 처방을 따라 살면 다음 생에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게끔 한다. 따라서 환생에 대한 믿음은 “카스트의 의무에 가장 열성적으로 매달리는 쪽이 바로 다음 생에 지위를 높이고 싶은 욕구가 가장 높은 최하위 계층이고, 이들은 사회 혁명이나 개혁을 통해 카스트 제도를 무너뜨리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저자는 “유대교-기독교 전통은 기존 사회 질서가 정당하고, 공정하고, 지킬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잘 다듬어진 이념적 정당화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이 세우지 않으면 권위도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권위는 신이 세운 것” 같은 논리입니다. 여러 종교는 젠더 불평등과 전통적인 가사 노동 분배를 허용하기도 하죠.
체제의 폭력, 대중의 공격도 체제 정당화에 일조하죠. 기성 관습과 대립하거나 그에 도전하는, 활동가·언론인·시위 참여자 등은 체포, 구타, 투옥 같은 신체적 처벌이나 사회적 따돌림의 우려 등 불확실성과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권력 체제에 대한 대항은 큰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죠. 경찰과 군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안전과 안정에 대한 욕구”가 정당화에 작용합니다. “비슷한 타인들과 동일시하며 친교를 맺고,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인 관계적 동기도 있습니다.
다시 “왜 비주류 집단 구성원은 자신의 개인적. 집단적 이익에 반하는 체제 정당화를 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체제 정당화가 불확실성과 예즉 불가능성을 낮추고자 하는 인식론적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현 상태와 타협하는 것은 확실하고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정신적으로도) 저항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성과 위험을 불러온다. 어떤 사회 집단에게나 투쟁의 결과를 미리 알고 저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갈등이 끝나면 집단의 지위는 향상될 수도, 악화할 수도, 이전과 같이 유지될 수도 있다.
저자는 그람시의 다음과 같은 말도 소개합니다.
대다수 사람이 급진적 변화 이후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하면 망설이고 침착성을 잃는다. ……그들은 단지 현재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을 상상할 수 있으며,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지각하는 데는 실패한다.
왜 4명의 젊은 백인 남성은 미국 체제의 인종 분리를 거부했나
책이 ‘체제 정당화’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이를 체념·비관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집단 구성원이 시민권, 또는 다른 삶의 질 개선을 위해 함께 뭉칠 때, 그들은 사회 정의와 동시에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점도 소개합니다. “타인이 공정하게 대우받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안녕을 걸거나 희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저자는 ‘사회 정의’ 문제도 들여다봅니다. 사회 정의는 ‘사회가 주는 혜택과 의무를 합당한 분배 원리에 맞게 분산시키는 상태’, ‘정치 관련 의사 결정을 포함한 모든 의사 결정의 과정, 규준, 규칙이 개인과 집단의 기본권을 비롯한 권리 및 자유를 (침해하기보다) 보호하는 상태’ ‘권력자뿐만 아니라 동료 시민들도 인간(그리고 다른 종)을 존엄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사회 정의 개념을 두고 여러 논쟁이 있습니다만, ‘정의로운 사회 체제’가 “불필요하거나 부정의한 고통, 착취, 학대, 독재, 억압, 편견, 차별을 조장하는 체제와는 반대”된다는 건 분명한 듯합니다.
이런 ‘정의로운 사회 체제’는 실현된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구 사회에선 모든 사람의 선거권, 여성 참정권, 노예제 폐지, 소수자의 시민권 보호 등은 많은 사회에서 더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노예제의 악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윤리적 정신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쉽다. 우리 중 거의 모두가 인종, 민족, 사회계급 젠더, 성적 지향에 기초한 편견과 차별에 우리가 증조부모님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민감하다. 이는 진정한 진보가 거의 항상 느릴지라도 우리가 사회에서 도덕적 진보를 이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지금 놓치고, 간과하고, 눈감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걱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마 우리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비판적 통찰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순간에 사회 체제와 배치에 악영향을 주는 부정의에 계속 공모할 가능성이 있다.
이 인용 문단이 든 책 ‘맺음말’엔 비틀스가 등장합니다. 비틀스는 1964년 9월 플로리다주 잭슨 빌 공연을 앞두고 관객들의 인종 분리를 거부했죠. 존 레넌은 “우리는 (흑인과 백인으로) 분리된 청중을 대상으로 공연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다”고 말했죠. 폴 매카트니도 1966년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야 하나 그건 멍청한 짓 아닌가”라고 했죠. 매카트니는 흑인 인권 운동에 관한 노래 ‘Blackbird’를 만들기도 합니다.
https://ultimateclassicrock.com/beatles-jacksonville-1964/
저자는 매우 젊은 4명의 백인 남자가 50년 전 인종 문제에 관해 왜 그리 높은 도덕적 명확성을 얻었는지 자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 체제를 바깥에서 보았다는 것이 1964년 비틀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기후, 노동, 빈곤, 젠더, 소수자 등 여러 체제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점도 필요할 듯싶습니다. 기후 위기나 차별금지법,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두고 ‘문재인 정권’ 때든 ‘윤석열 정권’ 때든 ‘안에서’ 체제에 계속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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