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 너머 ‘평화 공존’ 미래 기획할 때
새로운 남북관계
북 “적대적 두 국가관계” 선언
애써 외면한 진실 드러난 계기
민족 기반한 패러다임의 종언
소통 채널 복원부터 시작해야
솔직해져보자. ‘투(two) 코리아’를 선언한 올해 북한의 신년 메시지에서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놀라지 않았는지 말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정의하자 한국 사회가 애써 외면하려 한 진실이 드러나버린 것 같아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한 후련함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끊임없이 민족을 운운하며 통일을 되뇌었지만 남북관계는 여전히 ‘정전 체제’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분단과 적대의 시간이 길어지자 대부분은 북한을 동족은커녕 대화 상대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2022년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다시금 ‘적’으로 규정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 세력의 북한을 향한 적대적 인식에 버금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냉소적 시각과 무관심이 깊어졌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때라는 뜻이다.
남과 북의 ‘정신분열적 시각’
몇몇 연구 기관에서 발표하는 연례 통일의식 조사는 이미 북한과 통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 조사에 따르면 2007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지속적인 하락 추세에 있다. 2023년에는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43.8%)이 처음으로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남북을 아예 다른 민족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급격하게 상승하였고, 특히 20~30대 젊은 세대에서는 남북을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 없다고 응답한 비율(48%)이 같은 민족이라고 응답한 수치(41%)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한국리서치, 2023 대북인식조사) 통일과 민족에 관한 질문에는 오랫동안 교육과 사회적 규범을 통해 공유된 ‘정답’이 존재함에도 응답자들이 다른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조사 수치를 보수적으로 해석해야 함을 뜻한다. 즉, 현실은 조사 결과보다 통일과 민족에 대해서 훨씬 더 부정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사실 남북한이 분단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여전히 ‘민족’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할 것으로 믿는 것 자체가 지나친 기대일는지도 모른다. 1991년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서 명시된 것처럼 남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규정이 과연 현재에도 유효한 것인지 냉철한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민족 공동체를 부르짖으며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다가 조금이라도 여건이 요동치면 곧바로 국가 안보의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서로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남북관계의 역사인 까닭이다. 이것 말고도 남북관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헌법 3조에는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영토조항이 규정되어 있지만, 헌법 4조에는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평화적으로 지향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북한을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 대상으로 상정한다. 국가보안법에서는 북한을 불법적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지만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이래로 국제사회에서는 남북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한다. 그만큼 상대를 규정하는 데 정반대의 입장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남북은 서로를 향한 정신분열적 시각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 공동체성이 세대를 넘어 전수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서로 다른 체제로 존재하는 두 국가의 통일을 상상하는 것도 점점 더 요원해졌다.
게다가 탈냉전 이후 체제 경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한 남한 사회에서는 북한을 향한 이중적 시각으로 인해 남남갈등이 생성되기도 했다. ‘민족으로서의 화해·협력’ 아니면 ‘적의 안보 위협에 대응’ 이라는 두가지 프레임을 기준으로 정치권의 이념적 지형이 형성되는 현상이 도드라졌다. 최근에는 진영 간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화되면서 민족과 통일이라는 가치와 지향은 정치적 정쟁의 대상으로 추락하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나 남북한 교류·협력을 통한 통일이라는 목표는 특정 정치 세력의 어젠다로 폄훼되거나 북한에 우호적인 ‘종북’ 세력의 주장 정도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특히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면서 민족이라는 가치가 한반도 핵위기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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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더욱이 경제적 발전과 이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경험해온 남한 사회가 북한과의 민족적 공통성을 찾기도 쉽지 않다. 선진국만큼 잘살게 된 남한 사회는 헐벗고 가난한 북한 인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었으며, 권위주의적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넘어서 혐오감까지 느낀다.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파편화된 신자유주의적 주체인 남한 시민들에게 과거와 같은 소구력을 갖기 어렵고, 탈식민의 과정에서 일본이나 미국 등 외세에 대한 저항 담론으로 작동했던 민족주의는 남한의 국제적 위상이 상승하게 되면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최근에는 소위 말해 케이(K)컬처로 명명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민족주의에 열광하지만, 이것이 분단 현실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정치적·사회적 힘으로 확장될 가능성은 적다. 무엇보다 글로벌 사회를 살아가게 된 남한 시민들은 점점 더 민족보다는 각자의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위치에 따라 다양한 역할과 성격으로 자신을 규정짓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남한 사회에서 ‘민족’은 더 이상 절대적 힘을 지닌 집단 정체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선언’을 남북관계의 ‘파국’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최근 북한의 행보를 형해화된 ‘민족’이나 ‘통일’이 아닌 무엇이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지 혹은 형성되어야만 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전유해야 한다. ‘민족’의 자리에 어떠한 가치와 정체성을 구성해야만 전쟁을 막고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지, ‘통일’이 요원한 상황에서 남북은 무엇을 지향으로 삼아 미래를 기획해야 하는지 되묻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대방에게 우리의 통일정책이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이라는 위협으로 해석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세밀하게 복기해볼 필요도 있겠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지금, “민족”, “통일”, “특수관계”에 매달리기보다는 여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그러하듯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소통 채널을 복원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이번 ‘선언’은 민족 기반 남북관계라는 패러다임의 종언을 뜻한다. 이미 남한 사회도 예감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끝이 곧 시작이다. 민족 공동체 복원이 아니면 어떠한가. ‘민족’의 이름으로는 실패했다면, 이제라도 더 평화롭고, 더 윤리적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분단의 병폐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무엇보다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모두의 안전과 안녕을 확보하는 것이다.
김성경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에식스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공회대, 싱가포르국립대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 사회와 탈분단 문화를 연구하며, ‘갈라진 마음들’ 등 다수의 학술 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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