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로맨스 웹툰 작가, 결혼 두려웠던 이유

한겨레 2024. 1. 28. 1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가정폭력 트라우마
폭력적인 아버지…부모는 불화
남편 ‘함께 살기 힘든 존재’ 각인
아름다운 결혼생활 ‘이야기’로만
우울증 치료로 긍정적 미래 꿈꿔
클립아트코리아

화영(가명)씨는 30대 후반의 여성 웹툰 작가입니다. 그의 웹툰은 주로 20∼30대 남녀의 연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두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두 사람이 결혼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정작 화영씨는 집에서 작업을 하고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습니다. 웹툰 내용과는 달리 화영씨는 결혼할 생각도 없고 혼자 원룸에서 지내는 생활에 익숙합니다. 웹툰 안 판타지 속에서 그는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꿈꿉니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로 이어지기는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화영씨는 반려묘를 키우고 있는데, 화영씨의 유일한 대화 상대입니다. 웹툰 속에는 반려묘와 이름이 같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주인공이 자주 등장합니다.

연인의 청혼에 허둥지둥

화영씨 어머니는 딸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걱정합니다. 명절 때면 화영씨에게 선을 보면 어떻겠냐고 말을 합니다. 화영씨는 선 이야기만 들어도 질색합니다. 어머니에게 “결혼해서 살아보니 저에게 결혼하라고 말씀하실 만큼 좋으셨어요?”라고 되묻게 됩니다. 화영씨는 어머니의 삶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화영씨 아버지는 가족을 잘 돌보지 않았고 평생을 한량처럼 일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재산이 있어서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화영씨의 아버지를 ‘사장’이라고 부르며 추켜세웠지만 어린 화영씨는 일을 안 하고 사는 아버지가 왜 ‘사장’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화영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싸웠는데 주로 아버지의 여자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무척 야박했지만 친한 여성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썼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시고 오는 날이면 어머니와 심하게 싸우다가 어머니와 화영씨를 때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화영씨는 그 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어린 화영씨는 왜 이런 폭력을 당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너 때문에 저 웬수와 사는 거야. 너만 없으면 당장 이혼하고 싶다”고 화영씨에게 말했습니다. 화영씨는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매일 싸우는 것 같아 항상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존재는 불편하고 함께 살기 괴로운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태솔로’로 살아가던 화영씨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웹툰을 좋아하는 팬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어 몇년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화영씨뿐 아니라 반려묘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청혼했습니다. 그 순간 결혼이라는 게 무척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혼자 지내던 삶을 버리고 타인과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자, 남자친구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 이제는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화영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웹툰 작업도 못 하고 식욕도 없어졌습니다. 밤에는 눈물이 나고, 이제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 화영씨의 어머니는 딸에게 연락을 계속해도 연락이 안 되자, 집으로 직접 찾아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화영씨를 설득해서 정신건강의학과 외래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실제보다 과장된 어린 시절 기억

심리검사 결과 화영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와 전혀 연락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자신과 어머니에 대한 반복된 폭력과 이로 인한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싫어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연상하게 하는 다른 대상에게도 쉽게 화가 났습니다. 처음 취직했을 때 회사 사장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성 어른들과 함께 일하거나 만나는 일이 무척 불편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는 현재의 슬픔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만나 안 좋은 기억이 증폭되어 실제보다 더 두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결혼하려 해도 과거의 두려움이 현재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같은 상황이 아님에도 아버지가 했던 행동을 남자친구가 재연하지 않을까 미리 걱정합니다. 화영씨는 처음 심리 진료를 받을 때도 담당의를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편하게 생각했고, 속마음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화영씨 어머니는 오랜 기간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화영씨가 어릴 때부터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화영씨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지금이라도 극복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담당의는 화영씨의 아버지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모두 탕진해 주위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부인과 딸에게 자신이 준 상처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뇌 기능이 떨어지고 치매 증상도 보이고 있었습니다.

화영씨는 주요우울증으로 진단되었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담당의를 통해 자신이 상상 속 판타지에 빠져 있고 현실 생활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을 새우며 작업을 했고 새벽에 식사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느낌이 있어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치료를 하면서부터는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고 자정 전에는 꼭 잠을 잘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증상은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호전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 자신의 기억과 직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화영씨는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가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기억은 실제 사실보다 과장된 부분도 많았습니다. 인간에게는 현재의 기분에 따라 과거 기억이 왜곡되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화영씨는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가진 분노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자친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좀 더 활짝 열 수 있게 됐습니다. 결혼에 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전홍진 |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