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윤석열과 카이사르 한동훈의 공존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1. 2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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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사두정을 창시해 권력 분할에 성공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선조는 아들 광해군을 앞세워 임진왜란을 극복했지만 끊임없이 양위 소동을 일으켜 광해군을 견제했다. 사진은 드라마에 나오는 선조.
통상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면 로마 제정의 창시자인 옥타비아누스로 알아듣는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자’란 의미로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권력(임페라토르)을 확립한 이후 원로원에서 선물한 존호였다. 옥타비아누스 이후 모든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카이사르라고 하면 보통은 루비콘강을 건넌 로마사 최고의 군사 영웅을 떠올리지만 제정 로마 시대에는 황제의 후계자 혹은 부황제를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 즉 지존은 아우구스투스, 이인자는 카이사르였다.

로마 황권은 세습체제가 아니었다. 아주 드물게 아버지를 이어 아들이 황제가 된 경우가 있었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고 3대가 연이어 제위를 계승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 중에서 카이사르를 지명하면 아우구스투스 사후에 카이사르가 승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승계 구도였다. 물론 바람직한 것이 반드시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로마 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그는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자신은 동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고 자기 밑에서 카이스르를 하던 막시미아누스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올렸다. 동방에는 갈레리우스, 서방에는 콘스탄티우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해 변경 통치를 맡겼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카이사르가 지역을 4분 해 통치하는 구조였다. 그렇게 한 것은 제국이 충분히 컸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위 20년에 개선식을 위해 로마를 방문했는데 과연 그 전에 로마에 간 적이 있었는지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아무리 제국이 크고 변경 방위의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자청해서 권력을 나누는 지도자는 흔치 않다. 에드워드 기번은 말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확립한 권력의 균형은 그 창안자가 단호하고 뛰어난 수완으로 유지하는 동안에만 지속되었다. 이런 균형을 이루려면 두 번 다시는 찾아내기 힘들 여러 상이한 기질과 능력들이 어우러진 행운이 필요했다. 두 명의 황제에게는 질투심이 없어야 했고, 두 명의 부황제에게는 야심이 없어야 했으며, 네 명의 독자적인 군주들이 항상 전체적인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사 천재도 아니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같은 철인(哲人) 황제도 아니었지만 때로는 냉혹해 보이는 우아한 이성의 소유자였다. 제국 전체에 소급되는 중요한 결정은 본인이 내렸고 막시미아누스와 두 명의 카이사르는 그를 존경심으로 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계에서 최초로 황제직을 사임하는 선례를 남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동급의 아우구스투스 막시미아누스에게 “우리 인제 그만 물려줍시다”하고 설득했을 때 막시미아누스는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선임 황제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년제 단임 대통령제 국가이자 중앙집권 전통이 강한 대한민국은 모든 권력이 아우구스투스 한명에게 집중되는 구조다. 권력 내부에서 카이사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곤 하지만 승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박정희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카이사르는 없었다. 전두환 시절에 노태우는 주로 이인자이긴 했으되 카이사르로 공인받은 것은 임기 말에 가서였다. 김영삼은 ‘굴러온 돌’이면서 아우구스투스 노태우를 협박해 박철언, 이종찬 등 경쟁자들을 내쫓고 카이사르가 됐다.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될 때 까지 노무현이 카이사르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근혜는 2011년 여당의 재보선 참패를 계기로 비대위원장이 됐고 이듬해 총선 승리를 이끌면서 카이사르가 됐는데 그때는 이미 이명박 정권 말기였다.

아우구스투스 윤석열은 임기가 3년도 더 남았다. 카이사르를 볼 시점이 아닌데 한동훈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대중은 아우구스투스보다 카이사르가 콜로세움에 섰을 때 더 열광하고 있다.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안 들면 비정상이다. 세상에 치사한 것이 권력이다. 역사를 체계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이인자의 부상 앞에 쿨했던 일인자를 별로 알지 못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좀 다르다. 그는 권력공학의 달인이었고 사두정을 설계하고 통제했다. 실질적 위상에서 나머지 3명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시절은 없었다.

나는 윤 대통령이 한동훈을 비대위원장에 임명하는 것을 보고 ‘이분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되려 작정하셨구나’ 생각했다. 카이사르에게 변경을 맡겨 야만인들과 싸우게 하고 본인은 내정에 힘쓰는 구상 말이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양상을 보니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니라 선조 느낌이 난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이끌게 했다. 광해군의 공이 나름 컸는데 그게 못마땅했는지 선조는 이후 죽을 때까치 수도 없이 양위 소동을 벌였고 그때 마다 광해군은 멍석을 깔고 석고대죄했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 멘탈이 나갔다는 의견도 있다.

현대 민주정에서 카이사르를 세우는 것은 여론이지 아우구스투스의 의지가 아니다. 한동훈이 카이사르가 되는 것은 4월 총선에서 이긴다는 전제하에서다. 지면 카이사르는 커녕 자의반타의반 외유나 떠나야 할 것이다. 세상에 유치하지 않은 권력은 없고 일인자가 이인자를 바라보는 기본 마음가짐은 ‘떨떠름함’이다. 그러나 그 알력은 먼저 권력을 공고히 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한동훈을 먼저 카이사르가 되게 하라. 그다음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되든지, 선조가 되든지 알아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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