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아나운서 ‘근로자성’ 인정 첫 대법원 판결 나와 [민경진의 판례 읽기]
KBS 상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최종 승소
[법알못 판례 읽기]
그룹 신화 멤버 앤디의 아내 이은주 전 아나운서가 한국방송공사(KBS)를 상대로 근로자지위를 확인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민사 대법원 판결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근로자라고 판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나운서, 작가 등 방송국 소속 프리랜서 직종 종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심 “계약해지 정당”
대법원 2부(주심 대법관 민유숙)는 2023년 12월 21일 이 씨가 KBS를 상대로 “근로자임을 확인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이 씨 승소로 판결한 원심(2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에 피고의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확인의 이익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거나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고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는 등의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 씨는 2015년 10월 KBS 지방 방송국에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입사해 업무를 수행하던 중 2016년 9월 내부 테스트와 교육을 거쳐 아나운서 업무에 투입됐다. 2018년 6월 일손이 부족한 KBS강릉방송국, KBS춘천방송총국 등에 파견돼 두 곳을 번갈아 가며 출근했다. 2018년 12월부터는 아예 파견된 지역 방송국과 다시 계약을 새로 체결하고 아나운서 업무를 수행해 왔다.
그러던 중 2019년 7월 신입 직원들이 채용되면서 아나운서 업무에서 배제됐다. KBS 측은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 기간이 ‘인력 충원 또는 프로그램 개편 시’까지”라며 이 씨에게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이에 이 씨는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했다”며 KBS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씨는 “기간제 사용 2년이 지났으므로 기간제법에 따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간제법 제4조 제2항은 사용자가 2년을 초과해 기간제 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 해당 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무기계약직 근로자)로 규정한다.
1심은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이 씨에겐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고 시간에 맞춰 방송을 진행하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방송국을 이탈해 시간을 보냈다”며 “그 외에 근태와 관련해 승인받지도 않았고 일부 일정을 조율했지만 업무 처리 편의를 위한 것이지 KBS 측의 일방적 지시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밖에 이 씨가 업체로부터 화장품 등을 협찬받고 SNS 등을 통해 홍보를 한 점도 들어 “이런 홍보 활동은 KBS 직원에게는 징계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항소심서 ‘무기계약직’ 지위 인정
하지만 2심 법원은 1심을 취소하고 이 씨 측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씨는 배정된 방송 편성표에 따라 상당한 지휘·감독을 통해 정규직 아나운서들과 동일 업무를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사내 행사 진행 등 직원이 아니라면 수행하지 않을 업무도 상당 부분 수행했고 KBS가 제작하는 프로그램 외의 별도 방송 출연을 하지 않은 점, 출퇴근 시간도 KBS가 편성한 스케줄에 따라 정해진 점, 정규직 아나운서들과 일정을 공유한 점 등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KBS에 전속돼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 씨는 TV 및 라디오뉴스 2개 이상을 맡아 매일 업무를 수행했으며 근무 배정 회의에 매번 참석해 업무 분장을 협의하고 개국기념식 등에서 사회를 보고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휴가를 갈 경우 대체인력이 편성돼야 해 다른 아나운서들과 일정을 공유했으며 정규직 아나운서들이 휴가를 갈 때 대신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정규직 아나운서들과 사무실도 함께 사용했다. 이 씨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없었지만 일일 생방송을 맡고 있어서 거의 매일 출퇴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여는 진행하는 프로그램 건별로 수령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씨의 기간제 계약이 2년이 지나 갱신됐으므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고도 봤다. 재판부는 “KBS는 기간 만료를 이유로 들고 있지만 이미 2년 넘게 계약을 갱신해 왔으므로 기간제법에 따라 무기계약직 근로자”라며 “KBS 측의 계약 해지가 근로기준법 제23조를 위반한 부당해고”라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 제23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휴직·정직·전직·감봉, 그 밖의 징벌을 하지 못한다. 대법원은 항소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보고 상고를 기각했다. KBS는 대법원 판결 이후 이 씨에게 복직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돋보기]
방송국 프리랜서 근로자성 인정 사례 줄이어
이번 판결로 프리랜서 아나운서나 작가들에 대한 근로자성과 관련돼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이 씨를 대리한 류재율 법무법인 중심 변호사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근로자성은 계속 논란이 되고 있지만 행정법원이 아닌 민사법원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최근 방송업 분야 프리랜서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방송업 종사자들의 고용구조를 합리적으로 바꾸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는 2021년 12월 30일 KBS, 문화방송(MBC), 에스비에스(SBS) 등 국내 지상파 방송 3사가 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작가들 두 명 중 한 명은 사실상 근로자로 볼 수 있다는 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고용부는 그간 방송작가들은 형식상 ‘프리랜서’로 위탁계약을 맺고 일해왔지만, 그 탓에 노동관계법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제기됨에 따라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근로감독에 나섰다.
고용부는 조사 대상이었던 방송작가 363명 중 152명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방송사별로 보면 KBS는 조사 대상 작가 167명 중 70명, MBC는 69명 중 33명, SBS는 127명 중 49명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각 방송국이 작가들을 사실상 자사 소속 근로자처럼 사용했다는 의미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볼 경우 급여 지급 방식이나 퇴직금 지급 여부, 각종 복지 사항 등 근로조건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
해당 근로감독 결과 근로자로 판단된 방송작가들은 위탁계약에 따른 원고 집필 업무 외에 사측의 요청에 따라 다른 업무도 함께 수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방송사로부터 방송 소재 선정 및 원고 내용 수정 등의 지시를 받는 등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아 온 것으로 확인됐다.
방송사 직원의 지시에 따라 자료조사, 출연자 섭외 지원, 행정비용 처리 등 일반적인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사례도 다수 확인됐다.
방송 제작 업무를 보조하는 프리랜서의 근로자지위를 인정한 사례도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15부는 2023년 1월 13일 A 씨 등 12명이 YTN을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유지했다.
원고들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YTN 디자인센터장 등과 ‘프리랜서 도급계약’ 등의 이름으로 기간제 계약을 체결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계약을 갱신했다. 이들은 주로 뉴스 화면에 나타나는 자료 영상을 담당하거나 홍보물 제작 등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YTN이 지정한 근무 시간과 장소에서 업무를 했으며 YTN의 복무규율을 준수해야 했다. 정규직 근로자들과 구분되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들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통해 구체적·반복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았다.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원고 모두가 YTN의 무기계약직 근로자지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도 1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이 사건은 YTN이 상고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됐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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