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정약용을 토사구팽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24. 1. 2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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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력보다 실무 경험... 건축주 정조의 전략적 사고
수원 화령전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 이강웅 고건축가

 

정약용이 화성건설에 일절 배제된 것은 정조의 다산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다.

1791년 정조가 홍문관 수찬인 정약용에게 화성을 위한 새로운 성제를 연구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화성 성역은 출발한다. 기존의 장단점과 중국의 강점은 물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반영해 1년 후 화성 기본계획서인 ‘성설’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정조에게 올린다. 그리고 6개월 후 성 이외의 시설물 계획인 ‘도설’을 보고한다.

성설은 즉시 임금의 이름으로 공포한다. 바로 ‘어제성화주략’이다. 공포 후 2년이 지난 1794년 정월에 착공한다. 이후 성역은 1796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진행된다. 화성 건설 동안 정약용은 성균관, 홍문관, 우부, 규장각, 병조에 근무한 것으로 돼 있다. 화성 건설에는 일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약용은 화성에 대해 당시로는 가장 많이 알고 있던 관료였다. 그런 그가 왜 화성 건설에 참여하지 못했을까?

정약용의 ‘화성 성역’ 배제는 정조의 객관적 평가와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다. 이강웅 고건축가

본인의 피치 못할 사정이었을까? 아니면 고의로 배제한 것일까? 자의는 아니다. 여유당전서에 기록된 일화다. 정약용이 지방 근무지로 가는 길에 수원을 지나며 옹성 위에 설치된 오성지를 보게 됐다. 본인이 제안한 시설이다. 겉모양은 같았으나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됐음을 알았다. 이를 보고 다산은 “도면만을 보고 공사를 하니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 찾는 격’이라고 한탄했다”라고 기록했다. 한탄까지 할 정도면 정약용은 자신이 계획한 화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인 스스로 화성 성역을 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설은 부친의 사망과 천주교 연루 모함 사건을 이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부친 사망은 1792년으로 착공 2년 전이었고 성설과 도설을 열심히 만드는 시기였다. 천주교 연루 모함 사건도 1795년으로 착공 후 1년 반이 지나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시기적으로 정약용의 배제와는 관련성이 없다.

그렇다면 타인에 의해 배제된 것이다. 누구일까? 바로 정조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정약용을 배제했을까? 이유를 알려면 건축주 정조의 관점에서 화성 성역과 건설 시스템에 대한 인식을 파악해야 한다.

다산초당에 모셔진 정약용 초상. 이강웅 고건축가

첫째, 화성 성역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보자. 정조는 화성 성역을 공사가 아닌 대규모 사업으로 봤다. 영부사 채제공에게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를 추천하라 했다. 채제공은 조심태를 추천했다. 그러나 정조는 조심태를 2인자인 감동당상으로, 채제공을 1인자인 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그 이유로 “일의 체모가 중대하니 채 영부사가 총괄해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정조가 화성 성역을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또 정조는 화성 성역을 행궁이나 관아를 짓는 일반 건축물이 아닌 전쟁 군사시설물로 봤다. 핵심 조직에 군대를 지휘하고 전술을 아는 군사지식을 갖춘 사람을 임명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총리대신 채제공, 감동당상 조심태, 도청 이유경이다. 당시 채제공은 73세 영부사, 조심태는 53세 어영대장, 이유경은 금위중군으로 46세였다.

이에 비해 당시 정약용은 31세로 홍문관 수찬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나이나 직위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설 실무 경험이 없는 점이었다. 정조는 기획력과 실무 경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고심 끝에 실무 경험을 택했다. 이 선택은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객관적 평가의 산물이다.

둘째, 당시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보자. 정조는 계획과 집행으로 이뤄지는 당시 건설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다. 정약용은 계획자다. 집행은 설계와 시공이다. 정조는 계획자에게 집행 임무를 함께 맡기는 것이 화성 성역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 고민했다.

계획자가 집행까지 맡는다면 계획 의도를 시공에 잘 반영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잘못 계획된 것 개선,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것 개선, 장인들이 설계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단점이 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계획을 밀어붙인다. 이와 달리 성을 시공했거나 군사전략을 아는 실무 경험자가 집행하면 계획의 수정, 보완, 개선을 반영해 높은 완성도를 이뤄내는 장점이 있다. 정조는 계획의 발현과 견제를 통한 완성도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계획과 집행의 견제를 택했다. 따라서 설계자인 정약용을 배제한 것이다. 완벽히 배제했다. 한마디로 당시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정조는 ‘전쟁 군사시설’, 그리고 ‘높은 완성도’ 두 가지 모두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귀양 온 첫날을 지낸 주막 강진 사의재. 이강웅 고건축가

이렇게 보면 토사구팽이라 할 수 없다.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애정은 깊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여러 모함을 받을 때마다 지방 근무나 유배를 보냈다. 이는 처벌이 아니라 보호와 배려였다. 잠잠해지면 곧 불러들여 자리를 주고 승진도 시켜 왔다. 흔히 알고 있는 장기간의 유배 생활은 정조가 죽고 1년 후부터 시작됐다.

정약용이 화성 성역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객관적 평가와 건설 시스템에 대한 정조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다. 유교의 기본 바탕은 인간관계, 체면, 명분이다. 정조는 유교정신보다 실무 경험을 우선시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석산발굴, 민원해결, 조직안정, 자금조달, 그리고 군사시설물에 대한 개선과 향상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이뤄낸 동력이 됐다. 정약용의 발탁과 배제를 통해 정조의 객관적, 전략적 양면의 혁신적 조직 경영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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