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이 뭘 기억하나” 가해자 대한민국, 피해자를 모욕하다

신다은 기자 2024. 1. 2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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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방어’하는 피고 대한민국의 법정 언어 살펴보니… 피해자 비난, 색깔론 일삼아 자국민 보호 논리마저 옅어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201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한베(한국-베트남)평화재단 등이 진행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 원고로 참여해 최후 진술하는 모습.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제공

“8살밖에 안 된 어린 여자아이가 이런 것을 다 기억한다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원고가 소송을 제기한 경위와 의도가 불온합니다.”

이는 ‘피고 대한민국’이 쓰는 언어다. 피고의 소송 대리인단이 2024년 1월19일 항소심 첫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 항소 이유를 밝히며 쓴 문장이다. 대한민국(이하 피고)은 배상 의무를 벗기 위해 피해자 비난과 색깔론을 서슴지 않았다.

앞서 언급된 ‘8살 여자아이’는 올해 64살이 된 소송 원고 응우옌티탄(이하 원고)이다. 1968년 2월12일 한국 해병 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군인들이 74명을 학살한 일명 ‘퐁니·퐁녓 학살 사건’ 생존자다.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2023년 2월 1심 승소했으나, 피고 쪽 항소로 법정 공방을 이어가게 됐다.(참조 기사: [영상] 응우옌티탄에게 ‘3천만100원’의 의미는)

항소를 택한 대한민국은 어떤 언어를 사용해 학살을 부정했을까. 피고 쪽이 서면으로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준비서면, 재판에서 밝힌 항소 이유를 <한겨레21>이 종합해 정리했다.

“8살 여자아이가 어떻게 다 기억하나”

피고가 밝힌 항소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원고의 증언을 의심하는 대목이다. 원고가 학살 당시 ‘어린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피고 쪽은 “8살(혹은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라는 표현을 준비서면에서 여덟 차례나 사용했다. “원고는 한국 군인이 총을 쏘아서 생긴 것이라고 진술하나, 당시 8살밖에 안 되는 어린 여자아이의 진술은 원고의 기억과 판단에 의한 진술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원고 증언이 선뜻 이해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증언 자체를 허위로 치부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복부에 총격을 당해 창자가 밖으로 쏟아지는 상태가 된 8살 여자아이가 의식을 잃지도 않고 엄마를 찾아다니며 오빠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설 같은 소리입니까. 도무지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8살 여자아이가 방공호에서 올라간 순서를 기억하고 복부에 총상을 입은 뒤 총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식을 잃지도 않고… (중략) 참으로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허위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고 쪽은 원고가 “사후에 주입된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2018년 시민평화법정을 열어 원고에게 특정한 입장을 갖도록 훈련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원고에게 당시 상황에 대한 지식을 주입하고 학습시킨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원고의 주체성과 경제력을 무시하는 말도 덧붙였다. 원고를 돕는 소송대리인이 6곳이나 된다며 “월남에서 대한민국에 온 원고가 이렇게 많은 소송대리인을 선임할 이유와 필요,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원고는 기억도 부정확하면서 타인의 부추김만으로 소송을 제기한 ‘월남’ 사람이다. 피고 쪽은 이 소송이 “<한겨레21> 기자와 한베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이 월남에 있는 원고를 찾아가 소송의 원고로 내세워 대한민국을 피고로 제기한 소송”이라고 추정했다.

2001년 베트남을 찾은 고경태 당시 <한겨레21> 기자와 처음 만난 41살의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집 땅굴 위에서 수류탄을 들고 나를 노려보던 그날 그 남자 때문에, 한국 남자만 봐도 심장이 뛰었다”고 증언했다. 사진 고경태

‘배후설’ 등 음모론 가득한 피고의 세계관

피고는 같은 방식으로 학살 관련 증인과 증거의 신빙성도 모조리 무시했다. 생존자 응우옌티탄과 목격자 응우옌득쩌이의 증언은 물론, 학살된 주검들을 봤거나 마을 작전 중 총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 1중대 소속 군인 최영언·김형팔·류진성 등의 증언 모두를 “전언과 추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응우옌득쩌이의 목격담에 대해선 “가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성능이 떨어졌을 50여 년 전의 망원경으로 본 것”이라며 믿기 어렵다고 했다.

인신공격도 재차 등장한다. 피고 대리를 맡은 구충서 변호사는 류진성에 대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적폐 청산을 위한 1인시위를 한 달간 할 정도로 무언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워 언동을 하는 면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주목할 대목은 류진성의 증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류진성은 자신이 법정 증언을 결심한 이유가 “우리 후대들에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됐으면 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구 변호사는 그 점을 도리어 공격 빌미로 삼았다. “증인 류진성이 세상에 전쟁의 비참함을 알리고 전쟁을 방지한다는 등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증언하고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하다. 증인 류진성은 이 사건 소송의 배후에 있는 시민단체와 운동가들에 의해 많이 영향을 받고 있다.”

공식 기록 있는 사건마저 부인

퐁니·퐁녓 학살은 한국군 학살로 알려진 수많은 사건 가운데 객관적 자료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건이다. 부상자 치료차 현장을 찾은 미국인 본(Vaughn) 상병이 주검을 촬영해 사진으로 남겼고, 주월미군사령부도 따로 조사해 현장에 있던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 등 11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이들은 퐁니마을을 공격한 주체가 ‘한국군’(‘Korean’ 혹은 ‘ROK’)이었다고 명확하게 지목했다.

그러나 피고는 감찰보고서도 증명력이 낮다고 주장했다. 미군들 증언이 본인 추정에 불과하고 감찰보고서도 최종 결론을 ‘없음’으로 냈다는 이유다. 당시 보고서가 결론을 유보한 데는 한국군이 학살을 인정하지 않은 탓이 컸다.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주검이 널브러진 사진과 목격자 진술이 담긴 보고서를 받고도 “대량학살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답했다. 학살당한 자만 있고 학살했다는 이는 없으니 뚜렷한 결론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피고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인민위원회가 조사한 퐁니·퐁녓 학살 보고서도 진영을 들어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베트남이 공산 통일된 이후 공산베트남 정부 등에 의해 제공된 자료”라는 이유다. 이 자료는 현지 공무원이 마을 주민의 학살 증언을 듣고 기록한 보고서로, 공산주의 등 이념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피고는 해당 보고서가 ‘남조선’ 군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며 “이는 북한이 쓰는 용어다. 북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보고서 아닌가 생각된다”고 썼다.

1심에서 배척된 주장도 반복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학살해놓고 한국군에게 뒤집어씌웠다거나, 마을 안팎에 베트콩이 숨어 있어 주민 살상은 정당하다는 취지다. 피고는 “생명의 위협이 있는 전투의 아수라 속에서 베트콩과 순수한 양민을 구분하고 그마저도 총격 당시 무장을 하고 있는지까지 일일이 확인해서 사격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이 숨어 있다고 해서 비무장 민간인 모두를 잠재적 적으로 간주해 사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전쟁시 지켜야 할 인도적 대우 원칙을 담은 ‘제네바협약’과 부속의정서는 전쟁 중일지라도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민간인은 보호해야 하고, 의심스러운 사람도 적대행위를 하지 않은 한 민간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규정한다. 군사 논리로 살상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퐁니·퐁녓 학살은 희생자 절반 이상이 여성이고 어린아이와 노인도 34명 있었다.

2015년 4월8일 이재갑 작가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에 초청돼 한국을 찾은 퐁니퐁녓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왼쪽 위)과 빈안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오른쪽 위)이 김복동 할머니(왼쪽 아래)와 길원옥 할머니(오른쪽 아래) 곁에 선 모습. 박기용 기자

가해국 입장 구축할수록 피해 국민 보호 저버려

전쟁 가해자로 선 대한민국은 한때 피해자 입장에서 들었던 문법을 그대로 구사한다. 피해자 진술을 트집 잡고 사료의 가치를 폄하하며 반인륜적 범죄를 상황논리로 변호한다.

대한민국의 논리대로라면 군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적인지 민간인인지, 무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확인도 않고 쏘는 것이 ‘현실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런 논리를 펼치는 국가에 학살 피해자 국민도 살고 있다. 미군에 의해 200여 명이 숨진 충북 영동군 노근리 학살에서 “의심스러운 것은 다 죽이라”는 미군 간부의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가해자 입장을 공고히 구축할수록 피해자 국민을 보호하는 논리는 옅어진다. 원고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피고 대한민국이 법정에서 펼치는 논리는 곧 그 국가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저 승소만 할 수 있다면 이런 법리까지 내세워도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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