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내 것이로세”···목숨 걸고 북한산 오른 이성계의 한마디 [서울지리지]
졸본부여에서 남하한 동명왕의 아들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도읍을 정했다는 <삼국사기> 온조왕조 기록이다. 부아악은 삼각산(三角山), 즉 북한산을 말한다. 북한산은 우리나라 다섯 개의 명산 중 하나이자 중앙의 산이다. <국조보감> 등 여러 문헌들은 “오악이 있는데 동악은 금강산, 서악 구월산, 남악 지리산, 북악 백두산, 그리고 중악이 삼각산”이라고 했다. <동국여지지>는 또 북한산을 “한성의 진산(鎭山)”이라고 했다.
화강암의 지각변동으로 생성된 북한산은 산세가 웅장하다. 32개의 험준한 바위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봉우리들 사이로 10여개의 계곡이 굽이굽이 흐른다. 조선시대 수도방어를 담당했던 북한산성과 이궁지,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터, 진관사·문수사·태고사·도선사·승가사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사찰도 즐비하다.
하늘 드높이 치솟은 북한산 세봉 우리를 푸른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정약용(1762~1836)도 <다산시문집>에서 “어느 누가 뾰족하게 깎아 다듬어(誰斲觚稜巧), 하늘높이 이 대를 세워 놓았나(超然有此臺誰)”라고 했다.
백운대 등산길은 바위절벽을 올라가야해 난코스였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는 “조부인 부사공(강계부사 이필익)이 유언으로 ‘백운대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을 먹지말라’고 하였다”고 했다. 하돈(河豚)은 임진강에서 잡히는 황복으로, 맛이 일품이지만 맹독을 지녀 ‘죽음과 맞바꾸는 맛’으로 불렀다. 바위절벽을 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백운대 역시 죽음과 맞바꿀 만큼 절경으로 통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도 이 위험한 백운대를 정복했다. 조선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 수록한 관찬 시문집 <열성어제> 맨 첫부분에 이성계가 직접 지은 ‘등백운봉(登白雲峰)’이 실려있다. “칡넝쿨 부여잡고 백운대에 올라보니(引手攀蘿上碧峰), 암자 하나 흰구름 위에 솟구쳐 보이네(一菴高臥白雲中). 눈 앞에 펼쳐진 곳 모두 내 것이라면(若將眼界爲吾土), 중국 중원과 강남 땅인들 어이 마다하리( 楚越江南豈不容).”
수양대군(세조·1417~1468·재위 1455~1468) 역시 증조부 이성계를 닮아 정치적 야심도 컸으며 산도 잘 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이 수양과 안평 등 왕자들과 유신들에게 명해 북한산 보현봉(북악산 뒷쪽의 봉우리)의 지세를 살펴보게 했다. 서울도심에서 가장 우뚝 솟아보이는 보현봉은 악산에 속한다. 안평대군 등 모든 사람이 겁을 먹었지만 수양대군이 홀로 나는 듯이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탄복하며 “(수양대군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행만리로(行萬里路·만리를 걷는다)’를 통해 심신을 닦던 조선 선비들에게 북한산 등산은 수양의 필수코스였다. 조선중기의 문장가 유몽인(1559~1623)은 <어우집>에서 “벼슬길에 나오기 전에 삼각산을 집으로 여겨 아침, 저녁으로 백운대를 올랐다”고 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1707년(숙종 33) 중춘(仲春·음력 2월) 18일부터 이틀간 북한산을 등반하고 ‘삼각산유람기’를 썼다. <성호집>에 의하면, 수유리 조계동(구천계곡) 쪽으로 입산해 보허각(인조 3남 인평대균의 별장 송계별업 내 건물)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석가령(대동문), 중흥사, 문수암, 보현봉을 거쳐 탕춘대로 하산했다. 증흥사에서 아침을 먹은 이익은 백운대에 오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얼음과 눈이 채 녹지 않아 포기했다.
제8대 현종(992~1031·재위 1009∼1031)은 즉위전 북한산 신혈사(진관사)에 머물렀다. 현종은 제5대 경종의 3비이자 제7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964~1029)가 수차례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신혈사 주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현종은 즉위 후 호족세력을 배척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완성한 고려의 실질적 시조다. 고려의 역대 왕들이 현종을 기려 장의사, 승가사, 문수사 등 북한산의 사찰을 찾아 국가안녕을 비는 대규모 불교의례를 행하면서 북한산은 고려왕조의 종교적 성지로 자리잡았다.
북한산이 남성적 매력을 풍긴다면, 중국 계림의 봉우리를 연상시키는 도봉산은 여성미가 넘친다. 도봉산은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과 나란히 서 있다. ‘도를 닦는 봉우리’라는 뜻의 도봉은 신라말 도선국사(827~898)가 지었다고 전한다. 명칭에 걸맞게 천축사, 망월사, 회룡사 등 이름난 사찰이 많다. 자운봉(739.5m), 만장봉(718m), 선인봉(708m), 선선대(726m) 등의 봉우리들이 서로 다투듯 자태를 뽐내는 예로부터 ‘서울의 금강산’으로 불렸다.
농암 김창협(1651~1708)도 도봉산을 수시로 찾았다. <농암집>에 따르면, 농암은 32세인 1682년(숙종 8) 봄, 아우 김창흡(1653~1722), 9촌 조카인 김시보(1658 ~ 1734)와 도봉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했지만 비가 와서 둘은 오지 못했다. 김창협은 우두커니 기다리다가 섭섭한 마음을 시로 달랬다. “만장봉 꼭대기에 저녁 햇살 비치는데(萬丈峯頭西日照), 먹구름 흩어지기 어찌 저리도 더딜까(冥冥雲氣散猶遲). 단비 객의 마음 헤아릴 리 있으랴만(好雨不應愁客意), 봄산 유람 언약 모른들 그 어떠리(春山無那有佳期).”
창협, 창흡 형제는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들이다. 이들 두명을 포함한 여섯 형제 모두가 문장의 대가로 이름을 떨치며 ‘6창’(창집·창협·창흡·창업·창즙·창립)으로 불렸다. 6창의 활약으로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가 최고 전성기를 이뤘다.
조선중기 문장가 월사 이정구(1564~1635)도 도봉산을 즐겨 찾았다. 1615년(광해군 7) 가을에는 조정에서 축출돼 불암산 기슭 노원촌에 우거 중이던 백사 이항복과 함께 도봉산을 찾았다. <월사집>은 “바위는 더욱 늙어 예스럽고 나무는 더욱 늙어 기이하며, 봉우리는 더욱 높아졌고 물은 더욱 맑아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도 ‘도봉인’이었다. 신흠(1566~1628)의 문집인 <상촌집>은 “유생(劉生·유희경)은 ··· 어진 사대부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와 예로 몸단속을 하였지. 도봉산 아래에 집을 짓고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79세이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젊구나”라고 했다.
삼각산과 도봉은 산세가 수려하고 신비로운 기운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번화한 서울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두 산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터.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 잠곡 김육(1580~1658)도 <잠곡유고>에서 “그 누가 성시(城市·도시)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 알랴”라고 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열성어제
2. 고산유고(윤선도), 다산시문집(정약용), 청정관전서(이덕무), 어우집(유몽인), 성호집(이익), 목은집(이색), 서계선생집(박세당), 농암집(김창협), 정암집(조광조), 미수기언(허목), 월사집(이정구), 상촌집(신흠), 열하일기(박지원), 잠곡유고(김육)
2. 이혜순. ‘조광조와 도봉서원 존립에 대한 고찰’. 성균관대. 2023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오늘의 운세 2024년 9월 30일 月(음력 8월 28일) - 매일경제
- 코로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나…치명률 최대 88%, 백신도 없는 ‘이 전염병’ - 매일경제
- 결혼 6개월 만에 세상 떠난 28세 유명 싱어송라이터...팬들 충격에 빠졌다는데 - 매일경제
- 163cm에 43kg 다이어트 성공하더니...탄탄한 몸매 공개한 개그우먼의 정체 - 매일경제
- “8년간 받기만 해, 시언이 형 차 뽑아줬다”…기안84가 통 크게 쏜 ‘대형 세단’은? - 매일경제
- 6년간 콧물 ‘줄줄’ 감기인 줄 알았는데…알고 보니 뇌서 흘러 나왔다 - 매일경제
- '40년 현대맨' 정진행, 대우건설서 새출발 - 매일경제
- 서울지하철 “역명 팔아 150억 벌었다”…‘김윤아 남편근무 치과역’ 가장 비싸다는데 - 매일경
- 뜨거운 부산의 가을 … 17개 축제 쏟아진다 - 매일경제
- 어깨 수술 선택한 김하성 “FA? 지금은 몸을 먼저 생각했다” [MK인터뷰]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