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려준 ‘아기예수의 와인’…태양왕의 마음을 훔쳤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왕이라고 불리는 왕은 누가 있을까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한반도를 넘어 저 드넓은 만주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 한반도 삼국을 최초로 통일한 문무대왕 등이 생각납니다.
한자 문화권, 특히 조선에서는 모든 왕의 공식 시호에 대왕을 붙이긴했습니다만, 대왕이라는 표현은 원래 특별히 뛰어난 업적을 보인 왕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됩니다. 통용적으로 왕중왕(王中王)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죠.
비단 동양 문화권에서만은 아닙니다. 17세기 프랑스를 통치한 오늘의 주인공도 대왕(le Grand)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전 유럽에 위세를 떨치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자, 현대 프랑스의 영토를 거의 확정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 이 인물은 꽤나 친근합니다. 그와 연관된 여러가지 표현을 단편적으로 접하다보니 각각 다른 인물로 인식될 뿐이죠.
오늘 와인프릭의 주인공은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바로크 양식의 정수,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습니다. 또 ‘짐이 곧 국가’라는 후세에 길이 남을 도도한 자신감을 남기기도 했죠.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시대적 배경이 됐고 태양왕(Roi Soleil)이라 불린 군주, 루이14세와 그의 탄생에 얽힌 와인인 랑팡 제쥐(L′enfant Je′sus) 입니다.
당시 신랑과 신부의 나이는 불과 14살.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어로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루이13세 역시 9살때부터 즉위해 정사에 시달린 내성적인 소년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만난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부부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정치적 실권자로 부상한 리슐리외 추기경은 왕권을 약화하기 위해 둘 사이를 갈라놓는데 열중하죠. 어떤 역사에서는 리슐리외 추기경이 루이13세를 몰아내고 프랑스와 안 도트리슈를 수중에 넣으려는 시도를 했다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루이13세는 섭정을 펼치던 자신의 어머니와 주변을 모두 숙청하고 왕권을 잡은 만큼 정치적 기반이 약했습니다. 거기에 후사까지 수십년 간 없으니 ‘이대로 부르봉 왕조는 끝’이라는 얘기가 공연하게 돌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23년 만에, 마흔이 다된 두 부부에게서 사내 아이가 탄생합니다. 루이13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명(兒名·아이일때 부르는 이름)을 루이 듀도네(Louis Dieudonne·신의 선물)라고 지어줍니다.
하루는 프랑스 동북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본(Beaune)의 카르멜 수도회 소속 수녀 마거리트가 왕의 후계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너의 기도가 전해졌다’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실제로 왕세자가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차기 군주에 대한 우상화나 정당화 작업이겠지만, 이 이야기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갑니다. 각지에서 기적을 보여준 카르멜 수도회를 향한 기부금도 쏟아지죠. 수녀회는 이 기부금으로 아기 예수 목상을 모신 예배당을 건립합니다.
비슷한 시기 한 독지가는 이 동네(Beaune)의 가장 좋은 포도밭(Les Greves)을 수녀회에 기증합니다. 수도사들은 이 밭을 아기 예수의 밭(Vigne de l’Enfant Jesus)이라 명명하고, 이 밭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따로 모아 와인을 양조합니다.
20년이 지나 스무살을 맞은 루이14세는 자신의 탄생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지역을 직접 찾는데요. 그때 ‘아기예수의 밭’의 와인을 맛보고 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이때부터 랑팡 제쥐가 프랑스 왕실로 납품되면서 세계에 이름을 알립니다.
루이14세 치세 시기는 부르봉 왕가의 최고 전성기이자 프랑스의 전성기였습니다. 프랑스의 와인 문화가 활짝 꽃피는 시기기도 했죠.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각지의 와인들이 각국의 궁정으로 쏟아져들어오면서 와인의 다양성이 구분됐고 지역별, 메이커별 와인의 개성이 다양하게 자라난 시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화려함도 언젠가는 끝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루이14세의 뒤를 이은 루이15세는 유약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평생을 귀족들로부터 견제 받았습니다. 후왕인 루이16세는 왕권이 약화되다 못해 프랑스 대혁명을 겪었고, 끝내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부르봉 왕가의 몰락과는 상관 없이 랑팡 제쥐는 계속 훌륭한 와인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대혁명 이후 수립된 신정부의 소유가 된 ‘아기예수의 밭’은 부샤 페레 에 피스(Bouchard Pere & Fils)사(社)에 일부분이 매각됩니다. 부샤 페레 에 피스는 약 100여년 뒤인 1889년 밭 전체를 매입하고, 라벨에 수도회가 세운 예배당의 아기예수 목상을 그려넣어 마케팅에 적극 활용합니다.
특히 그 질감이 아기의 피부처럼 곱고 보드라워서 이름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평론가들은 랑팡 제쥐의 질감(Texture)을 실키(Silky·비단결 같은)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부르고뉴 프리미에 크뤼 등급다운 깨끗하고 신선한 과실미,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부드러움이 덧칠됐습니다.
재밌는 것은, 와인은 랑팡 제쥐라는 이름과 그에 걸맞는 맛을 지녔지만 정작 와인의 원료를 생산하는 포도밭은 이름과 달리 척박하다는 점입니다. 원래 이름이었던 레 그레베는 자갈밭이라는 뜻입니다. 돌이 많아 작물을 키우기 힘든 땅이죠.
포도나무는 척박한 환경일수록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이를 통해 농축된 복합미의 과실을 생산해낸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현대에 들어 랑팡 제쥐는 출산을 축하하는 의미의 선물로 종종 활용됩니다. 셀러링 환경만 갖춰진다면 20년 정도는 너끈히 버텨낼 수 있는 품질을 지녔기 때문에, 아기가 장성한 후 함께 즐기기 위해 큰 마음 먹고 구입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아이가 루이14세처럼 큰 족적을 남기기를 바라거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농축미 좋은 과실을 생산해내는 포도밭 같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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